Korean Association of Human Ecology
[ Article ]
Korean Journal of Human Ecology - Vol. 27, No. 1, pp.43-54
ISSN: 1226-0851 (Print) 2234-3768 (Online)
Print publication date 28 Feb 2018
Received 01 Feb 2018 Revised 19 Feb 2018 Accepted 19 Feb 2018
DOI: https://doi.org/10.5934/kjhe.2018.27.1.43

나혜석의 회화 작품에 나타난 여성 복식의 여성성 연구

안별 ; 이영재*
한양대학교 주얼리 · 패션디자인학과
A Study on the Femininity of Women’s Costumes in Na Hye-Seok’s Paintings
Ahn, Byeol ; Lee, Young-Jae*
Dept. of Jewelry Fashion design, Hangyang University

Correspondence to: *Lee, Young-jae Tel:+82-31-400-5696 , Fax : +82-31-400-5681 E-mail: YJL@hany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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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This paper aims to analyze the femininity of the ‘New Women’ among the works by Na Hye-seok and the features of modern clothing during the modernization process in the colonial era by using that was captured during the Japanese imperialism. For the methodology, the background of the emergence of the ‘New Women’ who possessed pivotal roles in the transition period to modern society and the formation of femininity was investigated The femininity of the ‘New Women’ as a practical and historical entity was embodied through the group costume of women in the patriarchal mood of the feudal society in the past and social environments during the colonial era.

The significance of women’s costumes can be converged into modernization. The transitional change in the research on costume history is very meaningful. Furthermore, it is necessary to pay attention to the research on costumes and femininity observed in the works by Na Hye-seok, the as representations of the modern woman, because such research can contemplate the social circumstances and reality of women at that time.

Keywords:

New Women, Na Hye-seok, femininity, modern girl, modernization

키워드:

모던화, 일제강점기, 근대여성성, 근대여성복식, 전통적여성성

Ⅰ. 서론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팽배했던 제국주의는 아시아 국가들이 변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고도의 산업혁명으로 인한 과학기술의 발달과 경제성장은 자국의 이익 추구로 인한 민족주의적 팽배는 식민지 개척을 위한 경쟁이 가속화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의 개항과 농업생산력의 급증으로 인한 사회변동은 신분구조의 변화가 일어났고 외래문물과 함께 천주교의 유입은 전통사회의 질서와 가치규범의 변화를 초래하였다. 한국의 근대화는 유교적 전통사회 기반위에 일본의 식민지배와 서구문물의 유입으로 인한 타율적인 서구화라고 할 수 있다.

근대 사회의 두드러진 변화 중의 하나는 현대 여성성 형성에 단초가 되었던 신여성의 출현이다. 조선의 봉건적 여성성을 극복하고 자유와 평등의 개념 아래에서 활동하였던 신여성은 자신들의 경험이나 학습을 토대로 봉건적 여성의 자각과 계몽에 힘썼다. 서양문물과의 유입과 근대 여성교육으로 형성된 신여성은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으로 많은 영향을 미쳤다. 신여성들은 전통적 여성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으로 서구적 외향을 추구하였고 이를 그들만의 패션으로 승화시켰다.

21세기에 나타난 여성의 영향력은 남성과 여성의 경계를 허물며 사회 전반에 확대 되고 있다. 국내·외에서 사회적, 정치적으로 두각을 나타내는 여성들의 등장으로 여성성과 함께 여성 집단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본 연구는 일제 강점기의 식민지 지배중심의 근대화 과정에서 나타난 근대 한국여성의 여성성의 형성과 신여성에 대한 개념의 의미와 함께 근대 여성 복식의 특징을 고찰하고 나혜석의 회화작품에 표현된 여성복식을 통한 여성성을 분석하는 것에 그 목적이 있다.

신여성에 대한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가 공존하는 많은 담론들 속에서 보수적인 전통 봉건 사회에서 신여성의 형성은 근대적 여성성 형성에 근거를 마련하였다. 신여성들의 출현으로 인한 복식의 변화는 근대화에 편입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나타난 과정 이였으며, 이러한 변화로 현대 복식문화의 형성에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신여성들이 추구했던 외적 표현은 복식사적인 측면에서 중요한 의의를 갖고 있으며, 일제 강점기 시대에 신여성 이였던 나혜석의 삽화와 회화에 표현된 복식에 대한 연구는 한국의 근대적 여성성의 형성과 한국 여성 해방논리에 대한 계보를 탐색하는 연구로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여성성 및 젠더(gender)의 개념은 서구문화권을 중심으로 보편적인 이론의 틀이 정립되어 왔으며, 여성성은 그 여성이 속한 사회, 문화적 환경과 경제적 여건에 따라 그 인식이나 실천 양상이 다르게 인식되어진다. 여성성은 시대적 환경에 따라 비물질적인 요소인 사회사상과 종교 혹은 도덕관 등에 의해 변화하는 통시적이고 통사회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와 같은 특징은 물질적인 요소인 복식에 의해서 가시화되어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즉, 복식은 그 당시 사회상의 반영으로 개인, 사회, 가치관이나 이념을 시각적으로 재현하는 역할을 하며, 복식은 사회 문화 속에서 사회 간의 질서에 의해 남성성과 여성성을 구별 할 수 있다. 특히, 여성의 복식은 시대에 따라 민감하게 반응하며 사회, 문화, 역사의 시각적 기록물로서 이를 통해 당시의 여성성을 해석 할 수 있다.

본 연구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근대사회로 이행해하는 과정에서 핵심적 역할을 했던 신여성의 출현배경과 여성성의 형성배경을 고찰하였다. 구체적인 역사적 실체로서의 신여성의 여성성은 과거 봉건사회의 가부장적인 분위기와 식민지 사회 환경에서 여성 집단 복식으로 구체화되는데 근대적 표상으로 등장한 근대여성복식의 변화를 분석하고 신여성의 대표적 인물로서 최초의 서양여류화가이며 신여성 이였던 나혜석의 회화 작품을 통한 여성 복식의 여성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연구의 범위를 개화기인 1910년부터 1945까지로 신여성의 형성시기와 나혜석이 활동했던 시기를 설정하였다. 이를 위한 연구방법으로는 여성성과 신여성의 출현배경과 함께 근대 여성 복식의 특징을 살펴보고 나혜석의 복식에 나타난 여성성을 고찰하고자 한다. 일반적 고찰로는 여성성의 문헌고찰과 발간된 신문과 잡지, 신여성에 대해 다루고 있는 서적들을 활용하고 시대적 풍자를 다룬 신문의 사설, 삽화 들을 연구하였다. 나혜석의 회화작품에 드러난 여성성을 고찰하기 위하여 나혜석의 현존하는 회화작품 총 41점 중에 복식이 표현된 인물화인 4점과 매일신보에 실린 소묘적인 삽화인 8점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선행 연구로는 여성복식과 구성 집단의 여성성에 관한 국외 선생 연구로 신여성(new type of woman)집단의 여성성의 표정 탐구, 엘리트 여성들의 신체적 태도 분석을 통한 가장성(假將性)및 사회 문화적 구성체로의 여성성, 커리어 우먼의 드레스 코드의 의미 연구와 드레스 착용을 통한 복식의 정체성에 대한 분석 등이 있다. 국내 연구는 문학, 잡지, 영화, 신문기사, 대중가요, 회화 등 다양한 매체들을 활용한 한국 근대 여성성이 연구되었고, 1920년대 신여성과 모던 걸(Modern girl) 집단을 대상으로 여성성 연구 등이 있다. 현재까지 나혜석을 주제로 연구한 논문은 미술사 외에도 문학, 여성학, 미학, 사학 등 다양한 분과 학문에서 진행되었으며 이미 상당한 연구 성과가 이루어져 왔으나 나혜석의 회화작품에 나타난 복식에 대한 연구는 전무하다. 본 논문은 신여성 나혜석의 회화작품에 표현된 여성복식의 여성성에 대해 고찰하고자 한다.


Ⅱ. 일반적 고찰

1. 신여성의 출현배경

개화기에서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의 근대 역사 속에서 가장 특징적인 변화는 여성의식의 변화로 인한 여성 해방의 단초를 마련되었다는 것이다. 근대 학교 교육을 받고 근대 지식과 교양을 갖춘 새로운 유형의 여성들이 1890년대부터 사회 영역에 진출했다. 19세기 말 일본이나 미국에서 근대 교육을 받고 1900년대 이후부터 한국에서 활동하기 시작한 근대 여성의 대표로는 하란사와 박에스더, 차미리사, 윤정원 등이 제1세대 근대 여성으로 언급된다. 제 2세대 근대 여성은 나혜석, 김원주, 김명순, 윤심덕 등은 신여성의 주된 준거 집단이면서 신여성 개념의 본령을 이루는 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Kim, 2016).

신여성(New Woman)이라는 용어의 개념은 영국에서 발간된 애틀랜틱 리뷰(Atlantic Review)에 기사화된 사라 그랜드(Sarah Grand)의 ‘독립적이고 교양적인 성적(性的) 자결권을 지닌 사람으로 옷을 입는 이상적인 현대 여성’의 표현에서 시작되었다(Kim, 2005). 신여성은 구여성상에서 탈피하여 남녀평등, 여성해방, 자유연애를 표방하며, 내적 요소로는 근대적 지식의 소유여부와 외적 요소로는 서구적 외모를 추구하는 새로운 여성 집단으로 논의된다.

국내에서는 신여성이라는 용어의 등장은 김일엽이 발간한 여성지 「신여자」에 처음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1920년대는 근대교육을 받은 여성군의 하나로 조선에서 여성해방의 논의가 사회적 범주로 형성된 시기였다. 신여성은 단순히 신조어가 아닌 여성의 정체성이 내재된 정치적 언어로서 선구자로서 역할을 했으며, 1920년대에 등장한 제 2세대 근대 여성은 봉건적 가족 제도와 결혼제도에 대한 비판과 함께 사회 전반에 걸친 개조와 개혁을 선도하여 여성의 개성과 평등에 기본을 둔 신이상과 신문명의 사회의 건설을 역설하였다.

1910년대를 거치면서 1920년대는 신여성에 대중적인 의미가 포함된 ‘모던 걸(Modern girl)’이 사용되었다. 신여성이 여성 해방과 여권확장에 대한 관심을 가졌다고 하면 모던 걸은 사상이나 지적 역량과 함께 과학 문명의 발달로 인한 사회 활동의 증가로 인한 외적 표현에 대한 관심의 증가로 1920년대를 지나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소비의 주체로서 인식되기도 한다.

신여성과 모던 걸은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남성중심의 봉건사회에서 현모양처 역할만을 강요당했던 구여성(舊女性)들과는 구별되는 여성상으로 등장하였다.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가족들에게 헌신하며 생활하던 여성들에 주어진 교육기회는 경제력을 갖추는 계기가 되었고 이는 경제적이면서 독립적인 인격체로 발전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2. 여성성의 형성

일반적으로 성(sex)는 생물학적으로 부여된 성의 의미를 뜻한다면, 젠더(gender)로서의 성은 사회학적 성의 의미로 구분된다. 젠더는 타고난 생물학적 성과 부여된 사회학적 성이 결합되어 타인을 인지하고 구별되는 기본적 속성이자 정체성을 설명하는 핵심적 요소이다. 여성성은 자연적으로 부여되는 생물학적 성에 사회적 의미가 결합되어 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여성성은 여성의 성 정체성과 연관되어 여성의 섹슈얼리티(sexuality) 연구와 함께 여성의 차이를 탐색하려는 개념이며, 여성의 정체성은 젠더가 부여된 단일성이 아닌 각각이 처한 특수한 상황과 환경에 따라 다원화된 자아가 젠더화(gendered)되어 표현된다. 역사적으로 여성성은 여성에 관한 남성 위주의 가부장적 사회적 요구에 반하여 형성되었으며 여성에 대한 억압과 차별에 대해 정당화되어 왔다. 여성성이 교육과 학습에 의해 형성되는 후천적인 의미의 여성성을 의미한다면, 페미니즘이 주장하는 젠더로서의 여성성은 기존 봉건 사회에 의해 왜곡되고 억압된 여성성이 교육과 비판을 통한 깨우침으로 개선되고 변화되어야 한다는 주장의 근거가 될 수 있다.

여성성은 통시적이고 통사회적인 성격을 지닌다. 여성성이 가지고 있는 통시적 특성에 따라 시대적 환경에 의해서 여성과 여성의 역할을 결정하는 데 영향을 주며, 통사회적인 특성에 따라 사상이나 종교나 도덕관 같은 시대정신과 같은 요소들인 변화한다. 여성성은 여성이 속한 사회 문화 전반의 규범과 미적 · 윤리적 가치에 의해서 복식으로 구체적으로 가시화되어 나타난다(Park, 2015).

한국은 전통적 유교사상에서 뿌리를 둔 삼종지도의 사상과 이념에서 파생된 여성성으로 사고중심이 남성중심의 가부장제의 의존하는 특수성을 지닌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받던 한국 근대 사회는 신문이나 잡지, 사진이나 영상의 매체를 이용하여 식민주의 사상이나 미의식이 강압에 의해서 세뇌 되어지는 시기로, 일제강점기의 영향에 의해 변화된 근대적 여성성은 현대 사회의 여성성의 형성에 기초가 되었다. 한국 여성의 집단적이고 직접적인 자기표현의 시작인 한국 여성성 의식의 집단적 출현은 근대적 여성교육의 장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Kang, 2005).

근대적 여성상이 형성되기 시작한 1910년대에서 1940년대는 한국의 신여성의 활동은 국가적인 차원에서는 자주 독립에 대한 지각과 사회, 경제 발전의 영향력을 주었고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여성의 경제적 · 심리적 독립을 의미했다. 이와 같이 일제의 식민주의, 유교적인 가부장제의 사회적 분위기에서 민족 차별과 성차별에 저항하며 여성 운동과 사회 · 경제 활동을 펼친 신여성들은 오늘날의 여성의 지위 향상을 위한 밑거름을 마련했다.

3. 나혜석의 작품세계

나혜석(羅蕙錫, 아호 晶月, 1896-1948)은 한국근대사에서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로서, 문필가로서, 또한 페미니스트로서 근대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하고 있다. 나혜석은 동경미술대학에서 조선 여성 최초로 서양화를 전공한 한국 근대사의 2세대 신여성으로 한 사람으로 기존의 가부장 사회제도에서 여성들의 정치적 해방과 가부장적 봉건 질서와 인습 파괴에 대항한 여성 해방의 선각자이다.

나혜석은 조선의 봉건적 여성 사회에 대한 새로운 여성적 사상과 일상을 전파함으로써 근대적 여성 사회의 본보기가 되었다. 나혜석의 서구 체험과 재현 방식의 중요성은 거구의 대도시의 관찰을 통한 기록하는 방식의 젠더화된 모델(gendered model)의 모범적 사례를 제공하고 있다. 문화는 사상적, 이념적, 시대적 변혁을 통하여 혁명적 가치를 산출하는 매개체이며, 문화의 유동성과 혁명성을 고려할 때. 식민지 조선은 문화의 경합이 활발하게 이루어진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국(異國)의 사상과 예술 등의 근대 지식을 습득한 유학생들에 의해 조선의 현실과 부합된 해석으로 그 가치로 평가 할 수 있다. 나혜석은 동경에서 유학 후, 국내에서는 교사로서 서양화 기법과 관련지식, 사조 등을 가르쳤으며, 이국(異國)의 예술을 변역하여 국내에 소개했다. 나혜석을 통해서 번역된 서구의 문화와 예술, 사상과 가치는 뿌리 깊게 자리 잡은 봉건적 이데올로기와 남성 중심적 젠더 규범과 끊임없이 충돌하고 갈등하는 계기가 되었다.

나혜석은 도전적이며 도발적인 젠더 해방 사상의 번역을 통해 미술을 천시하고 폄하하던 조선 사회의 예술 인식에 정면으로 대응과 함께 당대 봉건적이고 가부장적인 젠더규범을 해체하고자 하였다. 나혜석은 일생동안 시, 소설, 희곡, 시론, 수필, 미술평론 등 104편의 글을 썼으며, 소설들은 한국 근대 페미니스트 소설의 효시로 평가받고 있다. 나혜석의 페미니스트로서의 면모는 그의 글과 실천적 삶에서 명확하게 드러났지만, 미술작품에서의 페미니즘적인 요소는 1980년대 페미니즘 미술이 이론적, 미술사적으로 정리가 시도가 시작된 시기인 1990년대 후반이 되어서야 페미니즘 미술의 관점에서 본격적으로 인용되기 시작하였다. 한국 페미니즘 미술사에서에서 나혜석을 유의미한 기준점이자 영감을 주는 원천으로 부각시켰다.

나혜석이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한 것은 1920년대부터였는데 그는 후배 백남순과 더불어 당대를 풍미한 여성으로 1926년 『동아일보』에 의해 각각 ‘여류예술가’로서 거명되었다. 1921년 3월 이틀에 걸쳐서 경성일보사의 내청각에서 열린 ‘녀자로서는 조션 처음’이라는 나혜석의 첫번째 개인전은 오천여 명이 다녀가는 대성황을 이루었고 70점 중 20여 점이 고가에 팔려나가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나혜석에 있어서 미술은 단순한 취미나 기호가 아니 삶의 총체성을 표현하는 도구로 이해되고 있다. 당시 서양화에 대한 조선 사회의 열악한 지식과 편견을 고려하면, 현대 한국 미술사에서 아직 나혜석의 작품의 위상은 다소 불안하다. 나혜석은 동경 유학과 구미만유(舊米漫遊)를 통한 서구 문화를 습득하고 그것을 식민지 조선에 전파 할 때 그 문화를 자신의 그림과 젠더 인식의 실천을 통해서 보여주었다.

Na Hye-seok's Work List


Ⅲ. 근대 여성 복식

1. 한복스타일

갑신년 이후 한복(韓服)저고리 길이는 1cm정도로 가량으로 극단적으로 짧아져 겨드랑이와 가슴이 보일만큼 짧았고 통이 좁은 소매통과 긴 기장의 치마로 인해 활동이 용이 하지 않았다. 이러한 불편함은 1900년 이후부터 여학생들을 중심으로 전개된 전통복식의 개량운동으로 인하여 저고리의 길이와 스커트의 길이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1910년대에는 여유 있는 소매에 길고 넉넉한 저고리 길이와 치마에 어깨허리를 달고 통치마 형태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스커트의 길이는 점점 짧아져 활동성이 가미된 형태로 변화하기 시작하였고, 헤어스타일은 전통적인 스타일인 쪽진머리가 유지되었다.

1920년대에는 한복의 개량운동이 활발히 논의되던 시기였다. 저고리의 길이는 개량운동을 인한 편리성 추구로 1910년대에 이어 긴 저고리의 길이가 유지되었으며 통치마의 착용이 일반화되었다. 통치마의 착용은 여학생과 신여성의 상징적인 코드로 인식이 되면서 기생을 비롯한 일반 여성들도 착용하게 되었다. 통치마의 스커트의 길이는 발등을 덮거나 발목정도에 오는 길이였으나 1920년대에 이르면 서구의 기능주의와 결합하면서 현저히 짧아진 것을 볼 수 있다. 헤어스타일의 경우는 옆으로 가르마를 타고 납작하게 틀어 붙이는 트레머리가 유행하면서 통치마와 함께 신여성을 지칭하는 대명사가 되었다.

1930년대는 저고리의 길이는 겨드랑이 밑으로 7-8cm로 길어졌으며 넉넉해진 배래선으로 곡선의 형태를 이루었다. 스커트의 길이는 무릎을 기준으로 보았을 때 무릎의 길이보다 조금 길거나 무릎 정도의 길이로 짧아졌다. 이러한 스커트 길이의 변화는 정장의 도입과 함께 전통적인 신발에도 변화를 주어, 버선 대신 양말을 신게 되면서 구두의 착용도 늘게 되었다. 1930년대부터는 양장교복의 등장과 함께 양장교복과 개량한복이 같이 공존하는 시기였으며, 헤어스타일의 경우도 정장의 영향과 1920년대 전후에 나타난 단발의 등장과 서구의 영향으로 퍼머가 유행하면서 전통적인 스타일과 공존하게 되었다.

1940년대는 전 세계적 전시체계와 일본의 파시즘으로 인한 침략전쟁은 의복 근대화의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전시체제로 인한 간단한 블라우스와 스커트의 착용으로 직선적 형태의 짧은 스커트와 군복스타일의 양장이 유행하였다. 이러한 양장의 영향으로 저고리와 스커트의 기장이 다소 짧아진 형태와 풍성한 주름치마에 세일러복 형태의 양장교복이 1930년대에 이어 개량한복과 같이 공존하였으며, 저고리와 스커트를 서로 다른 색상으로 자유롭게 입는 스타일이 나타났다. 일본의 강압으로 착용된 일본의 노동복 이였던 몸빼의 착용으로 여학교 교복에 양장의 블라우스와 같이 착용하는 여학교 등장했다. 일본의 몸빼 착용에 대한 강압적인 정책은 여성들이 스커트 대신에 바지를 착용하는 계기가 되었고, 1911년 이화학당(梨花學堂)에 농구가 소개된 이후로 근대 서구문화의 과시적 표현 이였던 스포츠의 보급으로 여성들은 자발적으로 바지를 착용하게 되었다. 신여성의 헤어스타일은 기존의 전통적인 헤어스타일의 비위생적, 비경제적이라는 이유로 서구의 스타일이 적극적으로 도입되었다. 전통적인 헤어스타일의 변형과 서구의 헤어스타일과의 융합을 통하여 다양한 헤어스타일이 시도되었다.

A change of Hanbok style

2. 양장스타일

근대 한국 의생활에 변화를 준 요인으로는 한국의 개화기를 거치면서 선진문물과 함께 직접 유입된 양장(洋裝)과 서구에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유학생과 신여성들을 통한 양장의 유입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한복에 기능성과 활동성을 추가하는 전통복식의 개량운동과 여학생들의 복장 개량과 함께 양장교복의 도입은 의생활 변화의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900년대부터 1945년까지의 신여성들의 양장(洋裝)은 서양 패션 유행과 흐름을 같이 하였다. 1900년부터 1920년 이전까지는 S자 실루엣(silhouette)의 아르누보 스타일(Art Nouveau style)과 S자 실루엣의 변형으로 인한 허리라인의 변화와 A라인의 스커트가 일반적 형태였다. 헤어스타일의 경우는 전통적인 헤어스타일과 함께 근대화의 영향으로 새로운 스타일의 머리 양식을 나타났다. 대부분의 여성들은 쪽머리를 하였지만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박에스더와 최활란(崔活蘭)에 의해 소개된 신여성의 팜프도어(pompadour), 또는 히사시가미(庇髮)라 불리 우는 스타일은 이화학당 학생들에 의해 유행되었다. 신여성과 여학생들은 새로운 스타일에 대한 거부감이 적었기 때문에 여러 가지 형태의 헤어스타일의 유행을 선도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A change of Western style

1920년대는 신여성층의 증가와 여성단체를 통한 강습과 잡지와 신문 등의 언론에 힘입어 양장전용의 차림이 일반인들도 착용하게 되었고, 1927년 4월 13일자 「조선일보」에서 “중국의 대표적 모던 걸”이라는 기사에서 ‘모던 걸’이라는 용어가 처음 사용되면서 양장의 착용은 다양한 스타일로 확대 보급되어지면서 양장 착용 인구가 점차 늘어나게 되었다.

헤어스타일의 경우는 신여성을 지칭하는 트레머리가 유행하면서 히사시가미의 스타일은 사라지게 되었다. 1920년대 패션은 여성의 경제적 독립과 해방의 사회적 현상을 반영한 가르손느(garçonne), 보이시(boyish), 플래퍼(flapper) 스타일과 스포츠의 유행으로 마린룩(marine look)이 등장하였다. 전반적으로 초기에서는 장식이 가미된 스타일로 긴 길이의 스커트로 나타났지만. 중반기 이후부터는 스커트의 길이는 무릎까지 짧아지고 의복의 장식은 사라진 직선적인 스타일 나타났다. 제 1차 세계대전 이후, 1920년대 전후로 등장은 단발은 19세기에 이루어진 남성들에 대한 단발령에 비해 상대적으로 시기가 늦게 보급되었음에도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었다. 단발은 기능적이고 활동적인 스타일로 가르손느 룩과 플래퍼 룩의 유행과 더불어 ‘모던 걸’, ‘毛斷(모단)-걸’의 용어가 생겨날 만큼 사회적 이슈를 만들었다.

1930년대는 경제 공항으로 인한 사회적 여파는 슬림앤 롱(slim & long)스타일의 클래식하면서 우아한 아름다움을 요구하는 시대적 분위기가 나타났다. 여성의 인체곡선을 자연스럽게 표현해주는 바이어스 컷(bias cut)은 드레이프성이 좋은 크레이프(crêpe-de-Chine)나 조젯(georgeete), 시폰(chiffon)을 이용한 성숙한 여성미가 돋보이는 패션이 유행하였다. 1930년대는 1920년대보다 양장의 착용이 확대 보급되면서 대중화되었던 시기라 할 수 있다. 1930년 중반의 양장이 남성적인 스타일 이었던 것에 반해, 1935년이 되면서 여성적 미를 강조한 의복 스타일로 변하였다. 다양한 스타일의 스커트 형태와 과도한 장식은 피한 실용성이 강조된 스타일로 초기 스커트의 길이는 무릎까지였으나 점차 길어졌다가 무릎길이까지 짧아졌다.

연령과 체격에 따라 기성복으로 만들어진 ‘간단복’이나 ‘경제복’은 활동성이 좋은 옷으로 권장되기도 했다. 헤어스타일의 경우, 신여성들 사이에는 일시적으로 웨이브를 만드는 핀컬(pincurls)의 유행하였고, 1937년경부터는 퍼머넌트 기기의 유입으로 단발머리에도 퍼머넌트 웨이브를 하는, 퍼머넌트 웨이브가 유행하기도 시작했다.

1940년대는 1930년대 말부터는 전시체제로 들어서면서 다양하게 전개되었던 양장의 모습은 사라지고 간단복이나 몸빼 차림의 형태가 주를 이루게 되었다. 헤어스타일의 경우도 사치를 금지하는 시행령과 함께 퍼머넌트 웨이브도 금지되었다. 서구의 기능주의의 사회적 분위기와 융합되면서 다양한 헤어스타일로 발전하였다.


Ⅴ. 나혜석의 작품에 나타난 여성성

1. 전통적 여성성

제국주의는 근대적 형태의 경제적 지배를 포함한 국가간의 지배와 종속의 관계를 의미하는 개념이며, 식민주의는 제국주의의 특정한 역사적 형태로서 직접적인 군사적, 경제적, 정치적 통제를 포함 한다(Kang, 2005). 한국의 근대는 일본의 제국주의에 의해 식민화된 제국주의적 가부장제, 식민지적 가부장제 하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Kang, 2005). 조선사회를 지배했던 전통적 유교적 윤리관은 근대화로 인한 서구사상의 유입 속에서 보수적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여성 교훈서에서는 여성의 역할에 대한 언급으로 집안의 대소사를 관장하는 여성의 역할로 설명하고 있다. 단지 여성의 역할은 개인으로 인식되기 보다는 가족 관계 안에서 제한적인 정체성으로 인식되어 졌다(Park, 2015). 전통적 여성성의 재현은 여성성의 형성 과정에 개입되는 지배와 종속의 관계에서 형성된 가부장적 세계가 추구하는 여성의 역할과 맥락을 설정하고 있다(Park, 2015).

나혜석의 『매일신보』에 실린 초기의 소묘적인 삽화들은 여성의 생활과 복식에서 현실적인 모습들을 재현하고 있다. 특히, 여성을 중심으로 표현한 명절의 세시풍속과 신여성의 하루는 한국 근대 여성의 현실을 여성적 시각으로 표현하고 있다.

나혜석은 김일엽이 『동아일보』에 기고한 부인의복(婦人衣服) 개량에 대한 글에 대한 견해를 밝힌 글에서 한복의 치마를 흉부결속(凶婦結束)이라 하여 가슴아래에 어깨끈을 달아 가슴에 여유를 둔 통치마의 형태로 개량할 것을 권고했다. 『매일신보』에 실린 <섣달 대목> <초하룻날>에 표현된 여성의 복식은 전통치마의 활동성을 위해 한복의 트임을 막고 치마에 어깨허리 달아 통치마 형태로 삽화에 그려진 앉아있는 여성의 모습에서 이러한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다. <섣달 대목>의 삽화에 표현된 가족들과의 식사하는 모습에서 밥상의 위치를 통하여 가부장적인 이념의 공간의 분할을 확인 할 수 있다. 권력위에 군림하는 제국주의적 가부장제를 특징이 남성의 자리 위치에서 나타나 있고 전체화면의 위에 배치한 구도는 전체화면을 주도하며 권위적인 권력을 암시한다[Figure 1]. 또한, 가부장적 인습으로 나타난 여성의 과중한 가사 노동과 차별이 재현되어 있다[Figure 2][Figure 3].

[Figure 1 ]

Na Hye-Seok, The very end of the year 1, 1919

[Figure 2 ]

Na Hye-Seok, The very end of the year 2, 1919

[Figure 3 ]

Na Hye-Seok, The very end of the year 2, 1919

2. 이상적 여성성

나혜석은 사회의 보편적 가치였던 현모양처론을 비판하고 획기적인 여성해방론을 주장했다. 현모양처라는 단어는 일제 식민국 시대에 등장한 용어로 국가와 가정의 대응관계로 천황에 대해 가부장이 되며 국민이 집안 식구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여성은 가장을 받들고 아이를 키우면서 국가에 봉사하는 존재를 말한다. 현모양처론을 비판한 나혜석은 이상적인 여성상을 제시하며 지식 지예(地藝)와 분별력 있는 판단력, 현시대를 이해하는 개성적인 자각, 지성과 품성과 실력의 겸비한 이상적 여성성을 강조했다(Yoon et al. 2005). 이와 같은 견해는 1914년에 『학지광』에서 발표된 「이상적 부인」에서 현모양처는 여성을 노예로 만들기 위한 것이라 비판하며 김일엽과 더불어 사회활동과 저술활동을 통해서 일반 여성들을 선도하고자 했다. 이는 앞에 언급했던 전통적 여성성에서 보여 지는 식민화된 제국주의적 가부장제, 식민지적 가부장제 하에 형성된 여성의 역할과 연결성이 있다.

나혜석은 매일신보에 게재한 「김일엽의 가정생활」에서는 가사노동을 하면서도 사회활동을 겸했던 김일엽의 일상을 형상화하면서 그녀가 추구하였던 이상적 여성성을 표현하고 있다[Figure 4].

[Figure 4]

Na Hye-Seok, Kim Il-yeop’ Diary, 1920

1920년대 발표된 이 삽화의 복식은 실용적으로 개량된 한복의 형태인 통치마의 형태와 트레머리를 한 여성이 보여 진다. 1910년대에는 한일합방으로 인한 민족적 자각으로 인해 한복착용에 대한 애착은 한복을 실용적으로 개선하는 작업이 이루어졌다. 동양의복이 풍성한 주름으로 인해 인체를 드러내지 않고 단아한 자태를 칭송하며 폭을 좁게 하라는 김일엽의 의견(Na Hye Seok Society, 2016)에 다른 의견을 피력한 나혜석은 「김일엽의 가정생활」에서 풍성한 치마의 표현과 함께 허리까지 내려온 저고리의 길이와 폭이 좁아 배래선으로 실용성이 가미된 개량된 한복의 형태 보인다. 1920년대의 신여성의 복식을 트레머리와 개량한복의 착용으로 이상적 신여성의 삶을 제시하고 있다. 신여성인 김일엽의 일상을 통해 사회 활동을 하는 신여성들의 삶을 사회 활동 뿐만 아니라 가정에서 어머니나 아내로서의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하는 완벽한 여성을 이상적 여성으로 제시하고 있다.

3. 계몽적 여성성

근대여성의 현실에 대한 인식과 자각은 나혜석의 다른 삽화에서도 나타난다. 1920년에 발표된 <저것이 무엇인고>[Figure 5]에서는 양장스타일이 표현되어 있다. 1920년대는 귀국 유학생들에 의해 소개되었던 양장스타일은 특수계층에 한정 되어 양장착용의 수요가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다. 양복 위에 코트를 입는 스타일이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점차 저고리 치마 위에 코트를 입는 신여성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Figure 5 ]

Na Hye-Seok, What is that, 1920

<저것이 무엇인고>에 그려진 바이올린을 들고 가는 여성은 치마위에 외투를 입고 고무신이 아닌 구두를 신은 트레머리를 한 신여성이다. 여성은 가부장적 유교사회에서 사회적 존재로서의 정체성이 존재하지 않았고 가정과 사회에서 주체적 존재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러나 서구문물 유입과 근대 교육의 인해 여성들은 사회로 진출하는 기회가 되었다. 근대 교육과 함께 근대의 소비의 주체로 부상했던 신여성과 모던걸은 당시 유행을 주도하며 소비대열에 앞장섰다. 여학생이나 여학교 졸업생이나, 신여성은 ‘트레머리’와 ‘통치마’와 함께 신여성을 지칭하는 대명사되었고, 이 삽화에 묘사되어있는 여성은 소비의 주체로서 최신식 유행을 묘사하고 있다.

<저것이 무엇인고>는 근대 남성들이 신여성에 가지고 있는 보수적인 편견을 보여주고 있다. 화면 뒤쪽에 있는 한복차림의 남자는 양장을 한 여성에 대한 비난의 대상으로 화면 앞쪽에 차지한 양장의 남자에게서는 성적인 호기심을 갖는 성적 대상으로 표현되고 있다. <저것이 무엇인고>는 신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보여주는 것과 동시에 당대 신여성의 위치를 풍자적으로 재현하고 있다.

4. 양면적 여성성

자화상은 자신을 객관화하여 인식할 수 있는 방법이며 축적된 삶의 모습을 통한 자아 반영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1930년 중반이후에 제작되었다고 추측되어 지는 <자화상>은 나혜석의 중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Figure 6][Figure 7]. 강렬하게 표현된 이목구비는 이국적이고 중성적인 분위기를 나타나며 명백한 흑백의 대비와 함께 화면 전체를 어둡고 엄숙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국적인 이목구비의 표현은 서양에 대한 선망과 중성적인 표현은 남성에 의해 타 자화된 나혜석의 내면세계가 형상화 되어 있다.

[Figure 6]

Na Hye-Seok, 1932

[Figure 7]

Na Hye-Seok, Self-portrait, Unknown

<자화상>[Figure 7]에서 보여주는 신여성의 복식의 특징은 셔츠와 코트의 착용이다. 셔츠는 양복의 착용으로 유입되면서 신여성들 사이에서는 속적삼 대신에 셔츠를 착용하게 되는데 직선적인 실루엣과 라운드 네크라인이 주를 이루며, 1920년대 후반에는 보이쉬 스타일로 발전하게 되었다. <자화상>에는 남성적 스타일의 셔츠 착용과 옆으로 과장되게 표현된 트레머리, 강열하게 묘사된 서구적인 이목구비의 표현에는 성적 특성인 여성성이 표면적으로 나타나 있지 않다. 다소 남성적이라고 할 수 있는 얼굴 표현과 여성적으로 표현된 부드러운 신체의 곡선으로 인해 남성성과 여성성이 공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서구식 외모에 대한 동경으로 표현된 서구적인 이목구비의 표현은 식민지 조선의 여성이라는 전통적 여성성을 부 인하고 계몽적인 여성성의 구현이라고 할 수 있다.

나혜석은 당대 여성의 인물화에서 표현된 정형화된 전통적인 여성성을 거부하고 여성의 주체성을 추구했으며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에 의해 억압되는 여성의 현실을 재현하고 계몽하고자 하는 의지를 표현하고 있다.


Ⅵ. 결론

해외 경험을 토대로 이국의 문물을 접한 유학생 지식인들은 봉건적 잔재에 대항하며 새로운 이념과 사상을 자국민에게 전파하는 과정에서 조선의 근대화가 시작되었다. 식민지 조선의 근대화가 유의미할 수 있었던 것은 문화번역을 통한 사상과 이념, 일상과 예술의 혁명적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며, 신여성의 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신여성은 조선의 봉건적 여성성을 극복하고 자유와 평등의 개념하의 활동하는 자신들의 경험이나 학습을 토대로 봉건적 여성의 자각과 계몽에 힘썼다. 당대의 신여성은 외래문화에 대해 수동적으로 소비하는 주체가 아닌, 도입된 문화적 가치를 스스로 재현하고 실현과 전파를 통해 생산적 문화의 주체였다. 이질적 문화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적극적으로 문화의 경합을 주도하고, 문화의 융합과 변화를 촉구함으로서 식민지 조선의 신여성의 능동적인 면모를 보여주었다.

본 연구는 식민지 지배중심의 체제에서 나타난 신여성의 출현과 함께 한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나타난 근대 여성 복식의 특징과 신여성인 나혜석의 회화 작품에 표현된 복식에서 근대 여성의 여성성을 분석하였다.

일제 강점기의 시각매체를 통한 근대 여성 복식은 한복스타일과 양장스타일로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한일합방으로 인한 한복착용에 대한 애착은 한복을 실용적으로 개선하려는 작업이 나타났다. 1910년에는 사회활동을 하는 여성의 증가로 저고리의 길이는 길어졌으며 스커트의 길이가 짧아졌으나 전통적인 헤어스타일인 쪽진머리는 유지되었다. 1920년대에는 신여성이 활발히 활동하던 시기였다. 넉넉해진 소매폭과 길어진 저고리 길이와 짧아진 통치마, 트레머리는 신여성의 대명사가 되었다. 1930년대에는 현저히 짧아진 스커트의 길이는 전통적인 신발에도 변화를 주어 구두의 착용이 증가 하였다. 양장교복의 등장으로 1940년대까지 양장교복과 개량한복이 같이 공존하는 계기가 되었다. 1940년대는 전시체제로 인해 일본의 강압으로 몸빼를 착용하게 되면서 바지가 보급되었다. 기존의 전통적 헤어스타일은 비위생적, 비경제적이라는 이류로 서구적 스타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의 개화기에 서구문물과 함께 유학생들에 의해 유입된 양장은 한국 근대 의생활에 변화를 준 요인이었다. 1900년대부터 1945년까지 신여성이 착용했던 양장은 서양 패션 유행과 흐름을 같이 하며 변화하였다. 1920년대 이전까지는 허리라인의 변화를 따른 S자 실루엣과 A라인의 스커트가 일반적으로 나타났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유학생에 의해 소개된 팜프도어 스타일이 이화학당 학생들에 의해 유행되었다. 1920년대는 신여성층의 증가와 여성의 경제적 독립과 해방을 반영한 가르손느 룩과 보이쉬, 플래퍼 스타일과 단발과 함께 사회적 이슈를 만들었고, 스포츠의 유행으로 마린룩이 나타났다.. 1930년대는 경제공항으로 인한 사회적 여파로 클래식하면서도 우아한 스타일을 나타났다. 또한 퍼머넌트 기기의 유입으로 핀컬과 퍼머넌트 웨이브가 유행하였다. 1940년대는 전시체제로 인하여 다양하게 전개되었던 스타일은 사라지고 경제적이며 실용적인 간단복이나 몸빼 차림이 주를 이루었으며, 사치금지령과 함께 퍼머넌트가 금지되었다. 신여성의 헤어스타일은 서구적 스타일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면서 능동적으로 서구의 기능주의와 융합하며 다양한 스타일로 발전하였다.

나혜석은 한국 근대사의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이자, 문필가, 페미니스트로 유교적 전통적 윤리관에 대해 여성들의 정치적 해방과 가부장적 봉건 질서와 인습에 대해 저항한 여성 해방의 선각자이다. 나혜석은 도전적이며 도발적인 활동은 페미니스트 소설의 효시로 평가를 받았다. 미술작품에는 페미니스트적인 미약하다는 견해는 1980년 대에 페미니즘 미술이 이론적으로 정립된 후에, 1990년대 후반에 이르러 미술작품에서 페미니스트적인 요소가 인정받았다.

나혜석의 『매일신보』에 게재된 소묘적인 삽화들은 여성적 시각에서 한국 근대 여성의 생활과 복식에 현실적인 모습들을 재현하고 있다. 나혜석의 회화작품에 나타난 여성성은 전통적 여성성, 이상적 여성성, 계몽적 여성성, 양면적 여성성으로 분석되었다.

첫 번째, 조선사회를 지배했던 전통적 유교적 윤리관은 저고리와 통치마 형태의 개량한복은 전통적 여성성으로 나타나있다. 제국주의적 가부장제의 인습으로 인해 남성으로 인한 권위적인 권력과 과중한 여성의 가사노동으로 모습으로 재현되어 있다.

두 번째, 사회의 보편적 가치였던 현모양처론에 대한 비판은 실용화된 개량한복과 풍성한 주름으로 단아한 스커트의 모습으로 사회활동과 가정생활을 완벽하게 수행하는 이상적 여성성을 표현하고 있다.

세 번째, 양장과 한복의 공존을 통한 계몽적 여성성을 보여주고 있다. 구시대적인 남성의 편견에서 벗어나 근대 교육의 수혜와 근대의 소비의 주체로서 부상한 신여성 현실을 보여 주고 있다.

네 번째, 나혜석의 자화상을 통한 서구적인 이목구비의 표현과 남성성과 여성성이 공존된 중성적 표현을 통해 전통적 여성성을 거부한 여성의 주체성의 표현으로 양면적 여성성을 나타나고 있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근대화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복식의 변천은 복식사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또한, 신여성의 대표인물이였던 나혜석의 작품세계에 나타난 복식의 여성성 연구는 당시의 사회적 상황과 여성의 현실을 바탕으로 고찰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본 논문의 한계점은 신여성의 복식의 특성에 대한 연구와 나혜석의 작품에서 보이는 복식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성공적인 전시회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존하는 작품수가 미약한 자료적 한계에 있었다. 이에 후속연구로는 나혜석의 페미니스트적인 면모가 돋보인 문학작품과 복식과의 연결을 통해 연구를 보완할 수 있으리라 사료된다.

REFERENCES

  • Kang, S. M., (2005), A study on Korea's Early Modern Feminism, Seoul, Prunsasangsa.
  • Kim, K. I., (2016), New women, concept and history, Seoul, Blue history.
  • Kim, S. H., (2005), Darstellung der 'neuen Frau' in Romanen des europaischen Autorinnen um 1900, Dongduk Women's University Korea Women's Institute, (10), p93-106.
  • Park, S. G., (2015), Modern femininity of Korea investigated through the dress in the visual media of Japanese colonial era, Unpublished doctoral dissertation, Sungkyunkwan University, Seoul.
  • Yoon, B. M, Park, Y. T, Seo, J. J, Song, M. H, Kim, Y. S, Kim, H. M., (2005), Na Hye-seok & Modern History of Korea, Seoul, Prunsasangsa.
  • Na Hye Seok Society, (2016), It says Na Hye-seok, Seoul, Goldegg.

[Figure 1 ]

[Figure 1 ]
Na Hye-Seok, The very end of the year 1, 1919

[Figure 2 ]

[Figure 2 ]
Na Hye-Seok, The very end of the year 2, 1919

[Figure 3 ]

[Figure 3 ]
Na Hye-Seok, The very end of the year 2, 1919

[Figure 4]

[Figure 4]
Na Hye-Seok, Kim Il-yeop’ Diary, 1920

[Figure 5 ]

[Figure 5 ]
Na Hye-Seok, What is that, 1920

[Figure 6]

[Figure 6]
Na Hye-Seok, 1932

[Figure 7]

[Figure 7]
Na Hye-Seok, Self-portrait, Unknown

<Table 1>

Na Hye-seok's Work List

Na Hye-seok's Work List
Writing List Drawing List
poem novel · play essay literary criticism travels an unexplored work interview letters survey response print illustration cartoon Chosun Art Exhibition Winner Work existing work
13 59 9 1 22 8 18 15
104 41

<Table 2 >

A change of Hanbok style

A change of Hanbok style
1910s 1920s 1930s 1940s
Length of long Jeogori
Length of foot length skirt
Length of the shortened skirt Length of knee-length skirt Sailor-type bachelor uniform

<Table 3 >

A change of Western style

A change of Western style
1910s 1920s 1930s 1940s
Western style Na Hye-seok's western style Modern girl Universalization of pants (mombbe)
S-style with emphasis on shoulder and waist Silhouette of natural lines Silhouette of human body curve Straight silhouette of angled shoulde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