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Association of Human Ecology
[ Article ]
Korean Journal of Human Ecology - Vol. 26, No. 1, pp.65-83
ISSN: 1226-0851 (Print) 2234-3768 (Online)
Print publication date 28 Feb 2017
Received 19 Dec 2016 Revised 08 Feb 2017 Accepted 08 Feb 2017
DOI: https://doi.org/10.5934/kjhe.2017.26.1.65

19세기 파리 백화점의 출현과 패션산업

이금희*
서울여자대학교 의류학과
The emergence of department store and fashion industry in Paris during the 19th Century
Lee, Keum Hee*
Dept. of Clothing Science, Seoul Women’s University

Correspondence to: *Lee, Keum Hee Tel: +82-2-970-5627, Fax:+82-2-970-5979 Email: khlee@swu.ac.kr

ⓒ 2017, Korean Association of Human Ecology. All rights reserved.

Abstract

The aim of this study was to investigate fashion industry and the emergence of department stores in Paris with the development of fashion trading area. The research methods were combined in literature review and visual data analysis employing the 19th century data of Bibliotheque Nationale de France, Richelieu Archive, and Bibliotheque de Les Arts Décoratifs.

The results showed that the origin of the department stores was passage that was the commercial zone shaped along the modernized street with city improvement project in Paris, opening a new consumption chapter. Magasin de Nouveauté was recognized as the initial stage of department stores, displaying a wide variety of goods in divided section, using regular price strategies, employing lavish window displays in the wide shops. Magasin de Nouveauté become the beginning of the modern department stores, as the growth of specialization and enlargement of these, with the new commercial spaces harnessed with cutting-edge facilities and modernized building using selling strategy based on trust. They implemented loss leaders, free return or refund, high volume & low margin, white sale, and catalog production and advertisement as sales promotion and PR strategies. The study examined the changes of fashion as the development of process of department stores - from simple work clothes of city’s lower class to outwear such as mantles, capes, shawls that do not have to fit one’s body exactly various lingeries including chemise, corset, and pantalon - accessories like apron, head ornament, gloves, and stockings. Thus, the study concluded that department stores contributed to the production and diffusion of ready-made clothes and also to the high quality trend and diversification from the fabric-centered industry to fashion-oriented industry.

Keywords:

Paris fashion, department store, nineteenth century, passage, catalogue

키워드:

파리 패션, 백화점, 19세기, 파사쥬, 카탈로그

Ⅰ. 서 론

Philippe Perrot(1981/2007)는 『19세기 부르주아 사회와 복식』에서 “현재의 옷차림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19세기와 제 2 제정 시기(1852-1870)에 보다 특별한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 19세기는 개인과 익명의 군중, 댄디즘의 획일화, 차이와 동일함을 장려하는 세기였고, 제 2제정 시기는 의복의 앙시앵 레짐(ancient régime)과 결별하기 시작했으며, 기술과 산업 및 상업분야에서 결정적인 개혁이 일어난 시기였기 때문이다. Gilles Lipovetsky(1987)는『패션의 제국』에서 패션이 근대 서구의 탄생 및 발전과 뗄 수 없으며 패션이 등장한 때는 19세기 중반이라고 하였고 Peter Drucker(1968)는 『단절의 시대』에서 19세기 가장 중요한 성장시장은 대도시였으며 대도시에 자극받은 발명품 중의 하나로 백화점을 거론하였다.

이와 같이 백화점은 19세기 산업의 결정적 변화 시기에 나타나 패션의 근대화와 과정을 함께 했기에 패션디자인 연구에서는 중요한 부분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백화점 관련 주요 연구 동향을 살펴보면 일본의 경우 일본 근대 스펙트럼으로 백화점의 탄생을 연구한 Hyakkaten(1993/2003)의 연구와 봉 마르셰(Bon Marché) 백화점에 대한 Kashima(1991/2006)의 연구는 백화점이 근대화 과정 속에서 욕망을 진열하는 곳으로 소비자 관계에 초점이 맞추어져있다. 유럽과 미국의 경우 Gille(1955)는 파리 백화점들의 기원에 관한 연구, Miller(1981)는 부르주아의 문화와 백화점에 초점을 맞춘 봉 마르셰 연구, 그리고 Pasdermadjian(1984)은 백화점의 기원·발전·경제에 대한 연구로 역사적, 경제적 관점으로 이루어졌다. 국내의 경우 Kim(2006)은 근대의 탄생에, Choi(2007)는 백화점의 역사를 경영·재정·홍보에, Lee(2011)는 부르주아 생활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 패션과 관련시킨 연구는 미미한 실정이다.

그러므로 본 연구에서는 19세기 파리를 중심으로 등장한 백화점과 패션 및 패션산업에 관하여 고찰하고자 한다. 패션 현상의 독특함, 그 지배의 출현과 확립이 다른 곳이 아닌 근대 서구 안에서 이루어졌고, 오스망(Georges-Eugène Haussmann)의 대대적인 도시 변형 작업을 감행함으로써 근대화된 모습을 갖춘 파리는 ‘19세기의 수도’라고 불리웠다. 그리고 도시의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것은 백화점이라는 벤야민(Walter Benjamin)의 주장은 본 연구의 시대적 배경의 특징은 물론 도시 근대화와 패션발전의 상관성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본 연구에서는 이를 위해 백화점이 출현하게 된 파리의 환경은 어떻게 변화되었으며 백화점이 탄생되기까지 파리의 패션 상점은 어떠한 발전 단계를 거쳤는지 살펴본다. 나아가 백화점이 등장함으로써 근대화된 상점에서 보여진 변화와 특징은 무엇이었는지, 백화점의 출현과정에서 패션 및 패션산업은 어떻게 변화하였는지, 그리고 백화점에서 판매되어진 패션 제품들은 어떠하였는지를 살펴보고자한다. 이로써 본 연구의 목적은 19세기 파리에서 백화점 탄생의 환경적 요인과 근대화된 상점으로 발전과정에서 백화점의 기원과 모델을 찾아내고 이를 통해 19세기 백화점이 패션산업에 기여한 바를 밝히는데 있다.

연구 방법은 19세기 유럽의 역사, 정치, 문화, 예술, 패션 관련 서적 및 논문을 중심으로 한 문헌 연구와 회화작품, 일러스트레이션, 카탈로그, 삽화, 사진 등의 시각자료 연구이다. 관련 기록들을 살펴보기 위하여 프랑스 국립도서관, 히슐리(Richelieu)의 고문서관의 19세기 파리의 시각자료, Gallica의 패션 시각자료 그리고 파리 장식미술도서관의 19세기 패션 서적 및 패션 잡지를 대상으로 시각자료를 수집하였다. 당대 백화점의 패션 상품들을 고찰하기 위하여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된 봉 마르셰의 1869년부터 1912년까지 카탈로그 자료들을 참고하였다.

본 연구의 의의는 패션상권 및 패션산업의 변천과 함께 파리 백화점 등장의 역사를 고찰하는데 필요한 기초자료를 제공하였다는데 있다. 또한 국내외 기존 문헌에 소개되지 않은 19세기 백화점의 시각자료들을 수집, 분석하여 패션디자인 연구의 기초 자료로 활용할 수 있도록 제공한 것이다.


Ⅱ. 이론적 배경

1. 19세기 파리의 변화

18세기 파리는 15세기 이래 전형적인 중세의 도시로 허겐베르크의 1530년 파리지도를 보면 시테(La Cité)섬을 중심으로 구불구불하게 이어진 골목이 전형적인 중세 도시의 구조를 보여준다. “근대도시의 단조로움과 추악함에 너무나 충격을 받은” 푸리에(François Marie Charles Fourier)는 1796년에 “화재가 번지는 것을 막고 어떤 크기든 도시라면 모두 말 그대로 인류에 대한 전쟁을 벌이는 악취를 제거할 수 있도록” 설계된 “새로운 유형의 도시 모델”을 구상했다(Balzc. H. de. 1974). 이후 파리를 프랑스 뿐 만 아니라 세계의 수도로 만들려고 했던 나폴레옹 3세의 의지는 오스망화(Haussmannization) 라고 일컬어지는 대대적인 도시정비 사업을 통해 파리의 도로, 광장, 철도, 건축물, 하수도 등은 근대적인 외관을 갖추게 되었다.

프랑스 철도는 1827년 앙 드레지외(Andérezieux)와 생 테티엔(Saint-Étienne) 간 산업 노선이 최초로 완공된 이후 1835년 여객 수송 철도가 개통되었고 1842년 철도법이 제정되면서 철도 건설이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공간과 시간의 소멸을 주도하며 근대적 문명의 상징이 되었다. 1870년 약 1만 7.400km에 달하는 복잡한 그물망으로 확장된[Figure 1] 철도의 중심축은 파리였기에 경제 단위는 당연히 교통 투자와 경제 활동을 파리 쪽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

[Figure 1]

French railways, 1850, 1860, 1870, 1890 Paris Capital of Mmodernity, p.163

질퍽거리는 재료의 마카담(macadam) 포장도로를 대신해 화강암과 시멘트로 도로와 인도를 포장하여 운송과 보행이 더욱 용이해졌다. 파리 최초의 대중교통수단인 사륜승합마차 옴니버스(omnibus)는 하나의 사적인 독점기업인 파리 옴니버스 회사(Compagnie des Omnibus de Paris)로 통합되어 1855년에 347대가 1865년에 664대로 늘어 1억 7백만 명의 승객을 운송하였다. 이는 시외 지역들을 병합함으로써 도시인구의 증가와 이동성의 향상을 가져왔다(Perrot, 1981/2007). 또한 파리와 리옹 간을 운행하던 딜리전스(diligence)라고 불렸던 덮개를 단 원거리 사륜승합마차도 등장하였다. 1858년에 탄생해 파리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고풍스러운 ‘58가로등(réverbères 58)’ 뿐만 아니라, 가판대, 도로 소변기와 같은 거리의 디자인까지도 새로워졌다.

화가들은 앞 다투어 ​프랑세즈(Francaise), 콩코드(Concord), 에뚜왈(Étoile) 광장으로 나가던가 카푸신(Capuciness), 생드니(Saint-Denis), 몽마르트(Montmartre)와 같은 변모된 파리의 모습을 화폭에 담았고 마르빌(Charles Marville)은 파리 거리의 다양한 모습을 사진으로 남겼다[Figure 2, 3]. David Harvey(2003/2005)는 『파리, 근대의 수도』에서 1830년부터 1848의 파리를 발자크(Honoré de Balzac)를 통해 혁명적 정치와 유토피아 요강을 품은 근대성의 신화를 쓴 도시로 묘사하였고 1848년부터 1870년의 파리는 화폐, 신용, 금융. 여성의 여건, 노동력의 재생산, 소비자 중심주의, 스펙터클, 여가를 설명하며 물질화된 도시로 설명하였다.

[Figure 2]

Rue de Constantine, Paris, ca. 1865 http://www.wikipedia.org)

[Figure 3]

View of the Quai d’Orsay, 19th c Paris History, p.264

2. 19세기 파리패션의 변화

19세기 중반 낡은 귀족적 질서는 점차 힘을 잃어 부르주아의 세계로 바뀌고 있었다. 새로 귀족이 된 사업가와 은행가들로 엄청나게 불어났다. 귀족 작위는 갈수록 더 가치가 떨어졌다. 점점 더 늘어나는 중간계급은 귀족의 가치와 싸우면서 그것을 흡수하고 바꿔나갔다(Sassoon, 2006/2012). 철도노선의 확장으로 지방의 노동자들까지 파리로 몰려들면서 이루어진 중심화는 주변을 소외시키는 결과를 빚었다. 또한 “시테 섬의 빈민 주거지를 없애 버리는데 성공한다.”(Papayanis, 2004)고 했지만 이는 빈민계층을 교외로 몰아내고, 부르주아들이 시내 중심을 차지하게 되면서 상당한 이득을 챙기는 결과를 갖고 왔다.

경제적으로 윤택해진 부르주아들이 패션 소비문화의 주요층으로 급부상하면서, 사회적 신분을 나타내던 의복의 위계질서가 무너지게 되었다. 좋은 원단으로 만들어진 화려하고 아름다운 의상을 구입하는 것이 더 이상 왕족이나 귀족만의 특권이나 전유물이 아닌, 돈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입을 수 있는 선택의 개념으로 전환되었다(Les Arts Décoratifs, 2014). 제 2제정기의 튈르리 궁(Palais des Tuileries)은 다시 화려한 파리 사교계의 정점으로 빛나기 시작하면서 이들에게도 문호를 개방했다. 19세기의 부르주아 계급은 의복을 통해 외양에 정성을 쏟았고, 그 과정에서 기능적인 역할과 관련해서 의미를 표출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부르주아 계급에 속한 가장 보잘 것 없는 분파의 구성원들까지도 자신들과 아주 근접해 있는 노동 계급과의 거리두기를 중요하게 생각했다(Perrot, 1981/2007). 도미에(Honoré Daumier)의 삽화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는 실크 햇의 정장을 차려입고 배가 불룩한 부르주아는 쇼윈도에 진열된 상품에 관심을 보이는 반면 초라한 차림의 노동자는 일자리를 얻기 위해 신문을 보고 있는 장면이다[Figure 4].

[Figure 4]

bourgeois & proletarian, 1848 Paris Modernity, p.92

당시 두 계급의 차이점이라고 여겨지던 것을 포착한 것이다. 19세기의 사회는 부르주아 계급의 세력 확대와 도시 빈곤층의 증가 그리고 중산계급의 대두라고 하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면서 패션소비문화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3. 파리패션의 상권 변화

르네상스 시대에는 상점들을 한 군데로 모아 도시를 계획했다. 밀라노 지도 등 16세기 대량 제작된 지도를 보면 거리와 광장에 따라 지도의 모습이 재분류, 배열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그 거리와 광장에 들어선 것은 시장과 상점들이었다. 상점의 발전은 지도의 형태를 바꾸었다(Cho, 2011). [Figure 5]는 15세기 파리의 거리에서 보여지는 상점이다.

[Figure 5]

The road i n the 15th c. Bourgeois de Paris, pp.160-161

[Figure 6]은 17세기 Palais de Justice 근처에 있는 쇼핑 갤러리로 당시 파리지엔과 방문자들에게 최신의 럭셔리 상품을 제공하던 곳이었다. 섭정기(1715-1725)시대에는 사치스러운 의복제조와 판매상점들은 생 토노레(Saint-Honoré)거리를 따라 집중되었다.

[Figure 6]

Palais de Justice, 17th c. Fashion Show, p.15

18세기 중반 이후로는 파리 곳곳에 ‘마르샹 메르시에(Marchand mercier)’라고 불리우는 상점이 등장하여 신흥 부르주아들의 취향을 만족시킬 만한 다양하고 진귀한 전 세계의 물건들을 소개하면서 유행과 문화 변화를 이끌었다. 에드메 프랑수아 제르생(Edme François Gersaint)은 그 시대 대표 상점이었다[Figure 7](Les Arts Décoratifs, 2014). 18세기 가장 패션어블한 부티크는 루브르(Louvre) 북쪽에 바로 인접해 있는 팔레 루이얄(Palais Royal) 갤러리 주위에 있었다[Figure 8]. 1780년대 팔레 루이얄은 가장 패셔너블한 상점들이었다. 그리고 화류계의 여성들(demi monde)과 스타일리시한 고급 창녀(poules de luxe)가 약간 방탕한 분위기를 조성했다(Ribeiro, 1988). 의류무역에 관여한 중고 의류상과 기능공들은 레알(Les Halles)지역에 위치했다(Parma l& Grumbach, 2006). [Figure 9]는 근대화되기 전 1826년 레알의 모습이고 [Figure 10]은 1861년의 모습으로 거리개혁으로 달라진 상권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18세기 파리에서 가장 많은 패션 상점이나 아틀리에가 모여 있었던 곳은 생 앙투안 거리(rue Saint-Antoine), 생 드니 거리(rue Saint-Denis, 생 오노레 거리(rue Saint-Honoré) 등 이었다.

[Figure 7]

Antoine Watteau Gersaint shop, 1721 (http://www.wikipedia.org)

[Figure 8]

Palais Royal, 1780’s Fashion in the French Revolution, p. 21

[Figure 9]

Les Halles de Paris, around 1826 (before Baltard). Paris: history, architecture, art, lifestyle, in detail. p. 38

[Figure 10]

Louis-Jules Arnout (1814-68), Les Halles Centrales in 1861, Paris: history, architecture, art, lifestyle, in detail. p. 39

4. 파리패션의 인력 변화

패션 산업은 여전히 길드(guilds)로 조직되어있기 때문에 지정된 특정 패션 아이템을 생산하거나 판매해야 하는 많은 규율이 있었다. 메르세(mercers)는 직물을 판매하고 쿠튀리에(couturières)는 드레스를 제작하고, 여성 모자를 제작 판매하는 마르샹 드 모드(marchandes de mode)는 드레스들을 장식하였다(Steele, 1990). 타이외르(tailleur)는 의상을 만드는 일만 할 수 있었지 직물을 판매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18세기 중 후반에는 권한이 확대되어 직물 값과 제작비를 함께 청구할 수 있는 현대적인 제작 단가 책정 방식이 도입되었다(Les Arts Décoratifs, 2014). 18세기 귀족들은 상점을 직접 찾아가지 않았고 타이외르가 이들을 방문하여 체촌을 하고, 원단 및 장식방법을 제안하면서 주문자의 취향에 맞추어 제작했다[Figure 11].

[Figure 11]

Tailleur for women, 18th c. Une Journée Paris au Séduisante XⅧe siècle, p.91

‘마르샹 드 모드(marchand de mode)’는 ‘패션을 판매하는 사람’으로 18세기 당시의 엄격하고 보수적인 동업조합들의 틈새를 파고들어 의상뿐만 아니라 머리끝에서 발끝에까지 몸에 두르는 패션에 관한 모든 아이템을 취급하기 시작하였다. ‘마가쟁(magasin)'의 개념을 넘어 '부티크(boutique)'라는 의류 전문 상점을 통칭하는 신조어가 만들어졌다. 부티크는 손님이 본인이 원하는 스타일을 찾기 위해 방문했다는 점에서 완전히 새로운 시스템이었다(Les Arts Décoratifs, 2014).

모드 상인의 등장과 함께 18세기 말 프랑스 모드의 권위있는 창조적 예술가가 등장하였다. 마리 앙트와네트(Marie-Antoinette)의 모드장관(Les Magiciens de la Mode)이라 불리운 로즈 베르탄(Rose Bertin)과 조세핀 황후(L’Impératrice Joséphine)의 르로와(Louis Hyppdite Leroy)는 왕실 사교계의 모드를 지배할 정도로 유행을 창조해냈다. 이후 워드(Charles Frederick Worth)에 의해 기초가 놓여진 고급 맞춤복, 오트 쿠튀르(haute-couture)는 부르주아 계급의 요구에 부응하는 새로운 생산양식과 기성복 업체의 발전에 의해 한 단계 뛰어 올랐다. 직물 산업 역시 워드가 유제니 궁정의상에 리용의 견직물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다시 번영의 시대를 맞이하여 직조 기술자의 수는 1860~70년 사이 10년간에 배로 늘었다(Her, 1987). 19세기 중반에는 파리에 있는 대략 50,000명 여성이 ‘의복업’에 고용되었는데 초라한 재봉사부터 Mmes Camille, Vignon, Palmyre, 그리고 Victorine과 같은 잘 알려진 쿠튀리에까지 그 범위가 넓었다(Steele, 1990).


Ⅲ. 백화점의 탄생

1. 백화점의 기원

1789년 프랑스 혁명으로 인해 지역단위로 독점이 보장되었던 길드(guild) 동업조합이 철폐되고 새로운 집단 소매점 형태인 파사쥬(passage)가 등장하게 되었다.

이를 시대 순으로 살펴보면 루이 18세 말기에는 Passage du Caire(1799), Passage Des Panoramas(1800) 등이 들어섰고 제 1 제정 시대에는 Passage de la Ville I’Evêque, détruit(1815) 등이 들어섰다. 왕정복고 시대에는 Galerie Vivienne(1823), Passage du Grand-Cerf (1825-35), Passage Choiseul(1825-27), Galerie Colbert (1826), Galerie Véro-Dodat(1826), Passage du Ponceau (1826), Passage Vendōme(1827-28), Passage Brady (1827-28), Passage du Bourg-l’Abbé(1827-28), Passage Colbert(1828) 등 가장 많은 파사쥬들이 들어서서 전성기를 이루었다. 제 2공화국 시대에는 Galeries Saint-Marc, des Variétés, de La Bourse, Montmartre, Feydeau, Dans le Passage des Panoramas(1834), Passage Puteaux (1839), Passage Jouffroy(1845), Passage Verdeau (1845-46), Galerie de la Madeleine(1845) 등이 들어섰고 제 2 제정 시대에는 급격히 줄어 Passage des Princes(1860)가 들어섰다. 백화점이 등장한 이후인 제 3 공화국 시대에도 Les Arcades des Champs- Élysées (1926), Galerie 79 Champs-Élysées(1930) 등이 들어섰다(Moncan, 2011). 1786년 경 등장한 팔레 루이얄의 봐 갤러리(Les Galeries de Bois du Palais-Royal)는 첫 번째 파사쥬로 파리 파사쥬의 표본이 되었고[Figure 12] 이후 유럽 파사쥬의 표본이 되었다.

[Figure 12]

Les Galeries de Bois, ca. 1786 Passage de Paris, pp.4-5

당시 파사쥬의 정의를 살펴보면 여섯 개의 규율이 있었다. 즉, “1. 보행자 전용이다. 2. 다른 길로 가는 사람에게 지름길을 제공하며 번창하는 두 거리를 연결한다. 3. 상점들로 둘러싸여있다. 4. 빛이 통하는 것을 유지하면서 악천후에 대비하는 지붕을 가지고 있다. 5. 인공적인 수단인 가스로, 그 다음에 전기로 밝게 한다. 6. 사치스러움은 건축의 부분일 뿐만 아니라 상점에도 잘 드러나야 한다. 팔리기 위한 물건처럼 상점은 광채를 나타내야하고, 잘 갖추어져 있어야하며, 조금 값비싸야 한다. 또한 파사쥬에서는 바리에테 극장의 “낙원”(Le “paradis” aux Varietes)을 비롯하여 서점과 독서실[Figure 13]이 있어 문화생활도 즐길 수 있었다(Moncan, 2011).

[Figure 13]

Reading room of Galerie de Bois, 19th c. Passage de Paris, p.28

벤야민(Walter Benjamin)이 “산업에 의한 사치가 만들어낸 발명품” 이라 할 만큼 온갖 종류의 가게들이 빼곡히 들어찬 파사쥬는 “하나의 도시, 아니 축소된 하나의 세계”였다(Lee, 2011). Passage Panoramas는 20세기 말에 상당히 낡았지만 Galerie Vivienne[Figure 14], Passage Véro-Dodat 그리고 Passage Verdeau는 쇼핑구역으로 시대에 뒤떨어진 매력을 잃지 않고 있다. 19세기 쇼핑몰은 파리인들의 삶을 특징지워 주는 것이었다(Plazy, 2003).

[Figure 14]

Gallerie Viviene 2015 photo by researcher

파사쥬는 상업지구를 염두에 두고 거리를 따라 형성되었기 때문에 산책자들을 탄생시키며 소비의 장을 대중에게 소개하였다. 그러나 도시의 개조가 이루어지면서 걷기 편해진 포장된 도로와 거리를 비추는 가로등의 등장으로 인해 파사쥬는 내부로 대중을 유인하기엔 더 이상의 매력적인 장소가 아니었다.

2. 백화점의 초기 모델

대량생산의 환경이 조성되기 시작하면서 생산자와 판매자의 분리가 가능해 지자 새로운 개념의 상업이 출현하게 되었다. 1822년 마가쟁 드 누보테들(magasins de nouveautés)이 독립적으로 설립되었다(Tétart-Vittu & Silveira, 1992). 새로운 상점 또는 직물과 멋진 상품의 가게라고 불리는 새로운 종류의 상점은 1830년대와 1840년대 나타났다. 그 중에서도 봉 마르셰(Au Bon Marché), 루브르(Maison Louvre), 프렝땅(Au Printesmps)은 새로운 상점의 초기 단계에 있었다. 이러한 상점들은 새로운 패션 메가로 이전의 포목 양품점, 중고 의류상, 직물상과는 다르게 운영하였다. 즉 작은 가게와 달리 다양한 상품을 갖추고 가격정책을 펼쳤다. 저가 정책은 상품의 재고 회전율에 맞춰졌다(Blum, 1986). 라벨, 바겐세일, 출입자유, 교환 및 반품의 자유와 같은 판매정책과 함께 호화스럽게 꾸며진 인테리어 윈도우 디스플레이, 아름답게 늘어진 직물, 기름램프로 켜진 조명은 쇼핑객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Parmal & Grumbach, 2006).

19세기 중반 ‘두 개의 중국 인형(les deux figurines chinoises)’이라는 이국적인 상호를 단 마가쟁 드 누보테는 취급하는 물품의 규모부터가 기존 가게와는 차원이 달랐을 뿐만 아니라 넓은 매장을 상품별로 구분해 판매했고 신상품을 교체해 가며 진열하였다(Lee, 2011). 당시 가장 규모가 컸던 프티 생 토마(Maison du Petit Saint- Thomas)를 비롯하여 아 라 마들린(À la Madeleine), 오 프티 생 브누아(Au Petit Saint Benoit), 아 노트르담 드 로레트(À Notre Dame de Lorette) 등이 거리마다 생겼다. 마가쟁 드 누보테는 관광객뿐만 아니라 부유한 프랑스 사람들의 증가로 대중화 되었다. 가장 크고 가장 성공적인 것은 아 라 빌 드 생 드니(A La Ville de Saint-Denis)로 1845년에 개점하였다. 북역과 동역 가까이에 있는 포부르 생-드니(Faubourg St-Denis)와 파라디-프와소니에르(Paradie-Poissonière) 거리에 위치하여 급속히 성장할 수 있었다. 1870년에는 5개의 빌딩 공간을 차지하였다. 포플렝 뒤카르(Popelin-Ducarre), 메종 라살(Maison Lassalle), 그리고 꼼파닌 리오네즈(la Compagnie Lyonnaise)는 비비엔느(Vivienne) 거리에 위치했다(Parmal & Grumbach, 2006).

당시로서는 파격적일 만큼 원스탑 쇼핑과도 같았던 마가쟁 드 누보테는 근대 상거래의 성당으로 비유되는 백화점의 시초였으나 1848년 11월 혁명부터 1851년 나폴레옹 3세의 쿠데타에 이르는 사회 혼란으로 경제는 침체에 빠지고 심한 빈부 차와 엷은 중산층 때문에 대부분 도산하게 되었다.

3. 백화점의 출현

1855년 파리 만국박람회를 위해 지은 산업 궁전(Palais de l’ Industrie)은 1800년대 초반 아케이드 공간과 비교해 보면 형태와 재료는 동일하지만 규모 면에서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다. “건축에 대한 가장 중요한 영향 가운데 하나는 기획 규모의 변화였다(Loyer, 1988; Harvey, 2003/2005). 마가쟁(magasin)은 건물의 내·외관이 규모와 건축에서 새로워지면서 그랜드 마가쟁(grand magasin)으로 발전하였다[Figure 15]. 1869년 봉 마르셰의 신관은 산업 궁전과 같은 쇠와 유리를 주재료로 상점이라기보다는 극장이나 대성당을 떠올리게 하는 건물이었다. 1874년에 완성된 2기 공사 건물의 내부 크리스탈 홀은 엘리베이터와 전기조명 등 당시로서는 첨단의 설비를 갖추었고, 새로운 상업공간의 이미지를 완벽하게 실현해 소비자를 유혹하였다.

[Figure 15]

Les magasins du Bon Marché, 1863 Les modes de Paris depuis louis ⅩⅥ pp.61-62

도서실, 휴게실, 미술관 시설을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무도회 및 음악교실, 회화교실 등도 개설하였는데 이는 당시 유행하던 살롱의 연장선상에서 배치된 공간이었다. 귀족이나 부르주아들이 성이나 저택을 일상적인 생활공간에서 연회나 토론의 장으로 바꾼 것이 살롱이라면, 봉 마르셰는 살롱을 통해 사회적 역할이 커지고 과거의 풍습에서 해방된 여성의 욕망 분출구였다. 봉 마르셰는 자연스럽게 파리 최대 사교 살롱의 이미지도 갖추어, 파리인들 사이에서 베르사유 궁전에 버금가는 '소비의 궁전'으로 불렸다(Kim, 2006).

마가쟁 드 누보테가 대형화되고 전문화되면서 봉 마르셰는 백화점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봉 마르셰의 규모 확장과 발전은 카탈로그에 나타난 모습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1872년의 카탈로그에는 “Grand Magasins de Nouveautés Au Bon Marché” 라는 큰 제목과 함께 부시코(Boucicaut)의 이름이 적혀 있고 새로 들어선 건물의 모습이 표지에 그려져있다. 뒷면에는 “le système de tout vendre Bon Marché” 즉 “모든 것을 파는 봉 마르셰 시스템”이라고 적혀있다[Figure 16].

[Figure 16]

Bon Marché Catalogue, 1872 Bibliothèque François-Mitterrand

1875-76년 겨울호의 봉 마르셰 카탈로그에는 ‘기성복 모델(Modèles des Confections), 이라는 큰 글씨가 눈에 띄게 강조되어 있고 세브르에(Sèvres)와 벨포(Velpeau)거리에 위치한 봉 마르셰의 외관을 보여주고 있다[Figure 17]. 1912년 10월호 카달로그에는 ‘grandissement’로 봉 마르셰 별관 개막식을 (lnauguration des Nouveaux Magasins) 기념하고 있다. 그리고 뒷면에는 좀 더 확장된 건물 모습이 그려져 있다[Figure 18]. 1924년 봉 마르셰는 파리 본점 외에 비시, 알제리의 알제, 이집트의 카이로에도 지점이 개설될 정도로 국제적으로 성장하였다(Kashima, 1991)

[Figure 17]

Bon Marché Catalogue, 1875-76 winter Bibliothèque François-Mitterrand

[Figure 18]

Bon Marché Catalogue, October 1912 Bibliothèque François-Mitterrand

1852년 봉 마르셰 이후 1855년 알프레드 쇼샤르(Alfred Chauchard)의 루브르(Louvre), 뤼엘(Xavier Ruel)의 주창으로 1856 년 바자르 드 로텔 드 빌(Bazar de I’Hôtel-de Vill), 피에르 파리소(Pierre Parissot)의 1856년 아 라 벨 자흐디니에(À la Belle Jardinière), 1865년 쥘 잘뤼조(Jules Jaluzot)의 프렝땅(Printesmps), 1869년 에르네스트 코냐크(Ernest Cognacq)의 사마리텐(Samaritaine), 그리고 가장 늦게 1893년 라 파예트(La Fayette)가 등장하였다. 이들 백화점들은 기차역에 가까운 곳에 위치해 파리와 지방 시민들은 물론 만국 박람회를 구경하기 위해 온 방문객들과 파리 관광객들로 붐볐다.

4. 백화점의 소매업 혁명

만국박람회에 감동 받은 푸르동(P. J. Proudhon)은 '상설박람회'의 구상을 발표하였는데, 그의 아이디어는 20년이 지난 시점에서 부시코의 백화점을 통해 현실화되었다. 아리스티드 부시코(Aristide-Jacques Boucicaut)는 프티 생토마(Maison du Petit Saint-Thomas) 직원에서 마가쟁 드 누보테였던 봉 마르셰의 공동경영자가 되면서 판매 및 진열방식과 운영의 혁명을 일으켰다. 진귀하고 설레게 하는 것이 전시된 만국박람회처럼 백화점의 상품은 판매 목적 이전에 뛰어난 품질을 보여주고 그 존재를 알려주는 전시로 봉 마르셰의 '엑스포지시온'은 만국박람회(exposition universelle)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Kim, 2006). 1851년 런던 만국박람회 이후 파리에서 개최된 1855년과 1867년 만국박람회는 대중에게 새로운 시각문화를 선사해 주어 백화점이 탄생하는데 기여하였다. 1867년 만국박람회의 자료에는 남성과 여성 패션, 그리고 레이스 상점에서 사람들이 구경하는 모습이 묘사되어있다[Figure 19].

[Figure 19]

Ateliers of lace fabric, 1867 Scrapbook of illustrations

백화점의 등장으로 인한 가장 큰 특징은 패션상품에 적용된 판매정책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이전의 판매 기법이었던 가격 정찰제는 일부 제품에 국한되었지만 모든 제품의 가격 정찰제로 확대되었고 반품이나 환불 역시 기꺼이 받아들이는 정책이 본격적으로 실행되었다. 1875-1876년 봉 마르셰 겨울 카탈로그를 보면 “마음에 들지 않는 모든 구매는 교환되거나 ‘구매자’의 마음대로 총액 환불된다.”와 “작은 이익과 전체의 신뢰를 모두 파는 시스템은 봉 마르셰 백화점에서 전제된다.”를 표지에 내세울 정도로 신뢰를 주는 판매정책을 펼쳤음을 알 수 있다[Figure 20].

[Figure 20]

Bon Marché Catalogue, 1875-76 winter Bibliothèque François-Mitterrand

상품의 소매 마진을 대폭 인하하여 회전율을 높이는 철저한 박리다매, 테마에 따른 상품을 집중적으로 전시해서 판매를 촉진하는 대매출, 그리고 염가의 미끼상품으로 소비자를 유인하는 정책도 펼쳤다. 그 외에도 판매 비수기를 잘 넘기기 위해 2월과 8월에는 장갑, 레이스, 향수와 같은 특정 아이템 세일뿐만 아니라(Kashima, 1991) 무명천을 중심으로 블라우스, 속옷, 시트, 식탁보 등의 흰색 옷감을 대대적으로 판매하는 ‘백색상품 세일(Grande Mise en Vente de Blanc)’ 과 같은 전략을 펼치기도 했다[Figure 21]. 기존의 소매점보다 좀 더 낮은 가격과 넓게 나누어진 공간을 제공 한 것이 백화점 성공의 이유만은 아니었다. 소비자가 구입하지 않더라도 백화점은 물질에 대한 욕망과 감정을 불러일으키게 조직되었다. 비록 소비자가 구입에 대해 자유롭지만 무엇인가 사고 싶게 만드는 전략이 있었다(Williams, 1982).

[Figure 21]

Bon Marché Catalogue, January 1898 Bibliothèque François-Mitterrand

출판사를 제외한 대형 신문사들도 사내 인쇄소를 갖는 것이 매우 어려웠던 시절, 봉 마르셰는 자체 인쇄소를 설치해 카탈로그를 제작해 광고 판매에도 주력했다. 초기에는 ‘아쟁다-뷔바르(agenda-buvard)’로 불리웠던 핑크색의 수첩은 봉 마르셰의 강력한 선전매체 가운데 하나였다. 연간 판촉 스케줄과 바겐세일에 관한 사항이 일별로 정리되어 있고, 구매를 자극하는 라이프 스타일을 다채롭게 소개하고 있다. 또한 카탈로그를 이용한 통신판매를 적극 추진해 유럽은 물론 남미에서도 주문을 받았다. 카탈로그에는 기계로 가늘게 자른 직물 견본 견본이 붙어 있었다[Figure 22, 23]. 19세기 말엽 봉 마르셰는 겨울시즌 용으로만 150만권 중 26만권이 이탈리아, 독일, 스위스, 등지의 해외 고객용이 있었고 매년 해외용으로만 백만개가 넘는 카탈로그를 콘스탄티노플, 카이로 등의 고객에게도 보냈다(Lee, 2011). 자동차가 실용화되자 배달수단을 마차에서 자동차로 바꾸었다(Kashima, 1991/2006). 그외에도 포스터, 그림책, 엽서를 마케팅 수단으로 동원해 다양한 판촉활동도 펼쳤다.

[Figure 22]

Cutting machine & atelier History of Bon Marché, p.3

[Figure 23]

Bon Marché Catalogue, 1898 Bibliothèque rançois-Mitterrand

마가쟁 드 누보테가 대형화되고 전문화되는 과정에서 탄생한 봉 마르셰(Bon Marché)는 ‘좋은 시장’과 ‘가격이 싸다’라는 의미를 지닌 것처럼 백화점의 천재의 마케팅 기획과 홍보 전략 등으로 소매업의 혁명을 일으킴으로써 근대적 백화점이 탄생될 수 있었다.


Ⅳ. 백화점과 패션

1. 기성복의 등장

패션 제품 생산은 수 세기동안 이어져온 관행에 의해 옷감과 장식물을 구입하여 재단사에게 맡겨 제작되었기에 공급자와 제작자가 엄격하게 구분되었다. 18세기 산업혁명과 19세기 산업 기계화로 방직기나 직조기의 개량에 의해 직물의 양산체제가 가능해지고 1851년 싱거(singer)회사의 재봉틀 개량과 1863년 자수용 재봉틀의 발명은 기성복 생산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프랑스에서 미싱은 “가난한 사람의 기계”라고 여겨진 것처럼 대량의 싼 가내 노동력의 동원을 가능하게 하여 기성복 제작에 눈부신 발전을 촉구했다(Her, 1987). 신분이 낮거나 가난한 사람들은 고급 맞춤복을 구입하기 어려워 1807년 황제의 칙령에 의해 탕풀(Temple)지역에서 헌옷 도매와 소매가 이루어졌다[Figure 24].

[Figure 24]

The Market of Temple, 1901 La Grands Dossiers de L’Illustration La Mode, pp.66-67

이곳은 파리의 빈곤층에게 의복을 공급하는 서민 시장으로 기이한 차림의 멋쟁이들(merveilleuse)을 위한 의상 및 레이스와 값싼 장신구를 취급하는 까레 뒤 팔레 루이얄(Careé du Palais Royal), 면직물 스커트와 노동복을 전문으로 거래하는 까레 뒤 플로르(Careé du Flore), 누더기 옷이나 형태가 망가진 옷을 취급하는 까레 뒤 푸볼랑 (Careé du Pou-volant), 가죽으로 만든 잡동사니를 취급하는 까레 뒤 포레 누아르(Careé du Forêt-Noire)라는 넓은 창고에서 거래가 이루어졌다. 로통드 뒤 탕플(La Rotonde du Temple)은 탕플 구역의 원형 건물로 군복과 소극장이나 서커스단의 분장물품을 전문으로 취급하였다(Perrot, 1981/2007).

이후 피에르 파리소(Pierre Parissot)는 중고 의류상이 있는 탕풀 근처에 새로운 타입의 상점인 라 벨 자흐디니에(À la Belle Jardinière)를 세웠다. 노동자용 작업복이나 앞치마를 생산하면서 수작업을 분업화하고 다량의 직물들을 동시에 재단하는 방식을 채택하여 생산과정을 합리화했다. 또한 몸에 꼭 맞을 필요가 없는 기성복을 제작하기 시작하여 중고 의류보다는 약간 더 비싸지만 파리소의 상점은 빈곤층과 중산층의 늘어나는 수요에 부응해서 급격히 확장되었다. 1855년 라벨 자흐디니에의 광고를 보면 작업복, 일상복, 주말복을 정가에 구입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고 의상보다는 점차 신규 의상의 취향을 발전시켜나갔고 파리지엔 소매상의 발전에 맞는 트렌드를 반영하여 기성복을 확장했다(Parmal, 2006). 테르노(Terneaux)가 플라스 데 빅토와르(Place des Victoires)에 설립한 본옴므 리카르(Bonhomme Ricard)와 크루아 데 프티 샹(Croix-des Petits-Champs)에 쿠타르(Coutard)상점은 파리소의 사업을 모방하여 등장했다(Perrot, 1981/2007).

프티 생토마(Petit Saint Thomas)는 최초로 카탈로그를 제작하여 상품의 목록을 소개하고 직물을 종류별로 구분하여 판매했다. 또한 여성용 기성복 망토와 케이프를 판매하였고 상점에 테일러를 고용하여 기성복 란제리, 스타킹, 장갑, 크라바트, 피슈, 그 이상의 것도 제작하여 판매하였다(Pamal, 2006). 그 외 메종 라살(Maison Lassalle), 라 메종 포플렝 뒤카르(La Maison Popelin-Ducarre)에서도 기성복을 취급하였다. 라 메종 포플렝 뒤카르에서는 직물과 장식뿐만 아니라 유행하는 액세서리들도 팔았다[Figure 25]. 케이프와 망토는 몸에 꼭 맞을 필요가 없기 때문에 초기단계 여성 기성복의 견본이 되었다[Figure 26]. 또한 워드(Charles Frederick Woth)는 자신이 만든 옷에 라벨을 부착하였고 대량생산을 위한 디자인 모델을 판매하기 시작하여 1858년 이후 의류는 패션디자인으로 여겨졌다(Tyagi, 2012).

[Figure 25]

Le Moniteur de la Mode, 1846 Fashion Show Paris Style. p.51

[Figure 26]

La Mode, 1832 Fashion Show Paris Style. p.49

2. 백화점과 콩펙시옹

백화점 등장 이전의 여성복 드레스는 주문에 의해 가능했고 고객의 체형과 사이즈에 맞게 재단되었지만 체촌 후 고객에게 맞도록 조절되는 ‘반 기성복; (semi-ready made, pre-fitted garments)이 가능해졌다(Simon & Westwood, 1995). 콩펙시옹(confection)이란 여성의 기성복이라는 뜻으로 원래는 맞춤복에 대해 기성복이라는 상대적 개념이었는데, 오늘날엔 고급 기성복인 프레 타 포르테에 대해 대중적인 기성복(Grumvach, 1993/1994)을 말하는 것으로 당대 백화점 관련 자료에는 이 용어로 지칭되고 있다. 재킷과 코트 아이템에서 시작된 기성복이 점차 밀착되는 의상 특히 로브 또는 같은 재료로 된 재킷과 스커트의 여성복으로 발전하였다. 소비자는 최신 패션이 소개된 카탈로그에서 패턴을 고른 뒤 직물상과 상의하고 단추부터 레이스까지 트리밍을 고르고, 주문한 곳에서 체촌을 한다. 그리고 장갑, 모자, 양산, 스타킹, 숄과 같은 액세서리를 선택하면 완전히 새로운 앙상블이 되었다(Mancoff, 2012). 이와 같은 단계가 한 지붕 아래서 이루어지는 새로운 시스템인 것이다.

봉 마르셰의 경우를 살펴보면 독자적으로 드레스 제품은 물론 드레스 디자인을 판매하기도 했다. 지역 소비자들은 상점의 우편서비스를 통해 드레스 제작의 잇 점을 취할 수 있었다. 즉, 직물의 견본이 부착되어 있고 그림이 있는 카탈로그를 받아볼 수 있었고 패턴은 봉 마르셰 또는 주르날 데 모드(Journal des Modes)의 것을 사용하였고, 직물은 봉 마르셰에서 구입한 후, 지역의 드레스 제작자에게 의뢰했다.

Harper's Bazar의 파리 특파원은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봉 마르셰의 의상은 일반적으로 최신이 아니고 매우 파리지엔적이다. 그들은 보수적이고 경박한 것을 하찮게 여기기보다 의상으로 착용할 수 있게 보였다. 유행을 쫓는 숙녀들은 기성복 코트, 클락, 그리고 장갑과 손수건 같은 패션 액세서리를 유행을 따르는 사람들의 비난을 받지 않고 백화점에서 구입할 수 있었다(Blum, 1986, p. 30). 또한 라 파예트의 경우는 옷에 어울리는 외투, 모자, 가방 등을 모두 시리즈로 제작해서 세트로 판매해 수익성도 좋았다(Aux Galeries Lafayette, 1908)고 되어있다.

루브르의 경우는 간단한 치수를 재기만 하면 며칠 후에 옷을 찾을 수 있는 반 기성복이 있었고 맞춤의상에 비해 가격이 절반 이하였다고 백화점 기록에 남아있다(Grands magasins du Louvre, 1867). 1872년 3월 22일 뤽뤼스트라시옹: 주르날 위니베르셀(L’Illustration: Journal Universel.)에 실린 루브르 백화점의 봄 패션을 보면 망토와 기성복 모두 만들어진 정장과 드레스로 당대의 모드와 머리장식이 잘 나타나 있다[Figure 27]. 기사내용을 보면 「봄의 유행 그리고 루브르 백화점 1872년 3월 30일 “항상 수많은 고객들을 만족시키는 루브르 백화점은 현재 가장 빛나는 봄의 새로운 것들을 보여주는 전시회였다.”」또한 허리까지 덮는 여성용 코트 튜닉, 케시미어 숄, 모자 등을 소개하면서 직물, 색, 가격을 명시하고 있다(Les Grands Dossiers de L’Illustration, 1987). “일반적으로 가격이 비싼 기성품들과 주로 사회적으로 윤택한 계급을 대상으로 한다”(Dusautoy, 1867/2007)는 문구를 통해 루브르는 보수적이고 고급화를 지향하는 백화점이었음을 알 수 있다.

[Figure 27]

Spring fashion of Grandes Magasins du Louvre La Grands Dossiers de L’Illustration La Mode, pp.36-37

프렝땅 백화점의 경우에는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기존의 생산자들에게서 사입한 물건을 판매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직접 하청을 줘서 만든 자체 브랜드의 직물을 판매했다. 1870년 파리를 강타한 ‘마리 블랑쉬(Marie Blanche)’라는 옷감은 프렝땅 백화점이 리옹의 생산업체에서 직접 주문 제작한 직물이었다(Lee, 2011).

그러나 무엇보다도 백화점에서 판매하는 패션제품의 특징은 저가의 기성복이라는 이전의 생각을 바꾸도록 소비자를 교육시키면서 멋진 상품과 상류층의 라이프 스타일을 소개하면서 발전하였다. 예를 들어 모르니 공작이 1860년에 개척한 노르망디 해안의 드빌은 가장 패셔너불한 피서지였는데 당대의 바캉스를 홍보하면서 1880년 아쟁다(agenda)에는 봉 마르셰가 제안한 수영복 디자인이 포함되어 있었다[Figure 28]. 또한 1896년 러시아 황제 차르(Tsar)가 엄청난 각광을 받으며 파리를 방문한 이후 모피 유행이 촉발되자(Laver, 1996) 봉 마르셰는 남성 위주의 모피를 여성복에 포함시켰다. 밍크 모피 같은 고급품의 유혹은 특히 강해 백화점에서는 이와 같은 사치품을 상품목록에 포함시킴으로써 고급화를 지향하게 되었다.

[Figure 28]

Bathing suits Bon Marché designs,1880 The Bon Marché. pp.148-149

3. 백화점 카탈로그의 패션 제품

19세기에는 시각적 요소는 중요했다. 삽화가 들어간 출간물들은 대중의 상상력을 사로잡았고 발행부수도 늘어났다. 레이디스 매거진은 이미 1770년부터 자수 패턴과 낱장 악보, 심지어 유행 옷본까지 끼워서 팔기 시작했다. 주르날 데 드무아젤(Le Journal des Demoiselle)(1833), 모니퇴르 드 라 모드(le Moniteur de la Modes)(1843)도 이 선례를 뒤따랐다(Sassoon, 2006/2012). 라 메종 포플렝 뒤카르(La Maison Popelin-Ducarre)는 무료 월간 카탈로그인 특별 저널(Le Journal spécial des nouveautés de la Maison Popelin-Ducarre)을 출간했다.

백화점 역시 카탈로그, 포스터, 신문광고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판매 및 홍보에 주력했고 계절에 따른 세일 행사 품목을 선정하여 소비자를 백화점으로 유인했다[Figure 29].

[Figure 29]

Advertisement of Bon Marché, 1888 Le Monde Illustré p. 355

새로운 상품 소개는 카탈로그의 중요한 역할이었고 이중 직물관련 제품들이 주류를 차지했다. 정기 카탈로그는 봄·여름과 가을·겨울에 걸쳐 두 번 발행되었는데 19세기 생활백과 전서에 비유될 정도로 취급하는 상품이 많았다. 때로는 페이지 전체를 유색의 일러스트레이션으로 제작된 특별호도 있었다. 봉 마르셰의 카탈로그를 살펴보면 패션 제품들을 좀 더 자세히 알 수 있다. 1869년 여름 호에는 초록 캐시미어로 된 견본 의상이 일러스트레이션으로 제시되어있다. 이 제품은 바이어스 직물로 된 두 겹 의상으로 주름 장식이 풍성하다는 디자인 설명과 함께 가격도 제시되어있다. 뿐만 아니라 사이즈를 위한 체촌 방법도 소개되어 있다[Figure 30].

[Figure 30]

Bon Marché Catalogue, 1869 summer Bibliothèque François–Mitterrand

1865년부터 1885년까지의 기간에 패션 인쇄물, 정형화된 패턴 산업 그리고 우편배달 세일의 성장 덕분에 파리패션은 논란의 여지없이 국제적으로 확장되었다. 1835년 모든 잡지들은 일러스트레이션의 뒷모습을 도해한 그림을 포함하고 있었는데 이는 체촌 부위를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다(Groom, 2012). 1873년 3월과 4월호에는 특별 세일의 의상은 물론 여성용과 아동용 기성복이 준비되어 있음을 광고했다[Figure 31]. 1898년 1월호에 소개된 제품들을 살펴보면 작업복, 일상복, 주말복 이외에 속바지(pantalon)[Figure 32], 밤의 슈미즈(chemises de nuit) [Figure 33], 낮에 입는 여성용 슈미즈(chemises de jourpour dames), 앞치마(tablier)[Figure 34], 속옷 내의인 질레(gilets)[Figure 35], 어린이와 15세까지 소녀용 속옷(comptoir des layettes)[Figure 36], 아기용 턱받이(bavoirs)[Figure 37], 코르셋(comptoir des corsets) [Figure 38]이 있다. 1829년 금속 아일렛(steel eyelets)의 발명은 코르셋이 과장된 실루엣을 만들 수 있도록 지지했고 20세기 전반까지 코르셋은 여성들의 가장 중요한 속옷 중 하나였다.

[Figure 31]

Bon Marché Catalogue, 1873 Bibliothèque François-Mitterrand

[Figure 32]

Pantalon Bon Marché Catalogue, January 1898

[Figure 33]

Chemises de nuit Bon Marché Catalogue, January 1898

[Figure 34]

Tablier Bon Marché Catalogue, January 1898

[Figure 35]

Gilets Bon Marché Catalogue, January 1898

[Figure 36]

Comptoir des layettes Bon Marché Catalogue, January 1898

[Figure 37]

Bavoirs Bon Marché Catalogue, January 1898

[Figure 38]

Comptoir des Corsets Bon Marché Catalogue, January 1898

백화점에서는 당시 어린이와 숙녀용 코르셋(corsets pour enfants et fillettes-lingerie fine)으로 구분하여 판매하였다. 그외 손수건(comptoir des mouchoirs) [Figure 39], 여성용 양품류(bonneterie pour dames) [Figure 40] 즉 양말, 장갑, 모자 등이 있다. 전반적으로 속옷과 액세서리를 다양하게 판매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870년대까지 카탈로그들은 린넨으로 만든 제품들과 신상품들, 내의류, 기성복, 레이스, 모피, 장례용품, 머리장식품, 액세서리, 양탄자, 그리고 침구류 위주였지만 점차 실내 장식품, 어린이 용품 등으로 확대되었으며, 다양한 제품들을 제공하게 되었다.

[Figure 39]

Comptoir des Mouchoirs Bon Marché Catalogue, January 1898

[Figure 40]

Bonneterie pour dames Bon Marché Catalogue, January 1898

4. 백화점과 패션산업의 성장

제 3공화국 이후 사회 계급 질서가 또 다시 붕괴되자 부유한 부르주아가 패션의 중심인물로 등장하면 오트퀴트르의 중요 고객이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으로 옮겨지면서 패션 리더들은 여배우, 고급 매춘부 등으로 좀 더 다양화되었고 더 많은 계층의 인구가 패션을 추구하게 되었다. 파리의 패션은 중상층으로 유행이 전파되었 고 유행은 하류층에게도 미치기 시작했다. 파리의 백화점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쏟아내게 되었다. 이를 두고 루이 앙투안 드 카라치올라(Louis-antoine de Caraccioli)는 “유행들을 보지 않고 파리에 있다는 것은 완전히 눈을 감고 있는 것이다. 광장들, 거리들, 상점들, 장비들, 옷차림들, 이 모든 것이 유행만을 보여준다. ··· 하나의 유행이 개화하기 시작하면 파리는 그것에 대해 열광한다.”고 하였다(Perrot. 1981/2007). 특히 19세기 중반 마가쟁 드 누보테들이 대규모 자본을 바탕으로 백화점으로 급성장하였는데 이는 파리의 도시인구 증가와 부르주아의 등장으로 소비자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당시 기성복 제조를 위한 패션은 창의력도 매우 빈약했고 투박하고 멋없는 옷감으로 만들어져 보잘 것 없었다. 백화점들은 새로운 소비 습관을 제시하여, 기능적인 의류의 영역을 확대시켰다. 그리고 보다 상상력이 풍부한 패션을 통하여 의상을 발전시켰다. 이렇듯 노동자들과 소시민 계급을 겨냥한 새롭고 질 높은 기성복 제조를 대표하는 기관은 프랑스의 도매 쿠튀르 및 콩펙시옹 조합이었다(Grumvach, 1993/1994). 또한 마르샹드 모드들이 판화를 활용해 패션 스타일을 알리기 시작하면서 몇 몇 마가쟁에 이어 백화점에서도 카탈로그를 제작해 대중 소비자들에게 유행을 전파하였다. 더욱이 백화점은 다양한 상품과 더불어 선택의 자유를 제공하였고 합리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정찰 가격 제시로 대중의 욕구를 충족시켜 나갔다.

파리 패션 산업의 성장과정은 18세기 이래로 직물과 숄을 판매하는 가게를 의미하는 ‘novelty shops’에 의해서 기성복 산업이 시작되었고(Simon & Westwood, 1995) 탕플의 서민시장에서 헌옷 거래가 이루어지던 것에서 라 벨 자흐디니에(À la Belle Jardinière)가 시도한 수공업 제작의 다량 생산으로 기성복이 제작되었다. 미리 제작되거나 저렴한 가격으로 판매되는 신규 의상은 대량생산과 판매의 아이디어를 촉발시켜 일반인들을 위한 기성복 제조가 급성장을 이루었다. 당시 수작업 방식이긴 했지만 1845년경에 여성 기성복의 거래가 시작되었다. 1847년에 7,000명이상의 노동자를 고용하는 233명의 기성복 제조자들이 파리에 있었다(Perrot, 1981/2007). 여성복의 기성복은 1870년대 하류층을 위해 만들어졌고 사이즈별 기성복 제조가 시작되는 것도 1870년 이후의 일이다. 고급 기성복은 20세기 초가 될 때까지 성공적이진 않았다(Parmal & Grumbach, 2006).

프랑스의 백화점은 봉 마르셰를 비롯하여 대부분이 양품점에서 변신했다는 특징을 갖고 있을 만큼 백화점들은 직물판매 위주에서 루즈한 아이템에서 점차 밀착되는 기성복의 중요한 공급자가 되었고 대량생산 제품의 발전과 다양화의 정도에 따라 확장되었다. 즉, 백화점은 19세기에 등장하여 전례 없는 생산과 판매의 확산체제가 나타나 현재까지 꾸준히 지속되는 패션 소비문화의 한 단면을 나타낸다.


Ⅴ. 결론

본 연구는 19세기 파리를 기반으로 탄생된 백화점과 패션에 관해 근대화 관점으로 백화점 출현의 환경 및 단계를 패션 상권의 발전과 함께 패션산업을 살펴보는 것이다. 연구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백화점이 출현하게 된 파리의 환경 변화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파리는 대대적인 도시정비 사업을 통해 근대적인 외관을 갖추게 되었고 철도 노선의 확장으로 경제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도로와 인도의 포장으로 보행과 운송이 더욱 용이하게 되었고, 새로운 대중교통 수단의 등장으로 도시인구의 증가와 이동성의 향상을 가져왔다. 부를 축적한 부르주아의 등장은 패션의 위계질서를 변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패션산업에 새로운 활기를 가져왔다. 이들의 취향을 만족시킬 만한 마르샹 메르시에가 등장하였고, 독점이 보장된 길드 조직의 틈새를 파고들어 패션의 모든 아이템을 취급하기 시작한 마르샹 드 모드도 등장하였다.

이와 같이 도시 개혁을 이룬 파리의 경제 및 인구 집중화, 패션 상권 및 패션 전문 인력의 변화는 근대의 탄생을 이끌기에 충분하였고 패션의 주요 소비층 변화와 상점 방문의 구매를 즐기기 시작한 소비 문화의 변화는 백화점 탄생을 가능하게 하였다.

백화점이 탄생되기까지 파리 상점의 발전 단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프랑스 혁명 이후 길드 동업조합이 철폐되고 새로운 집단 소매점 형태인 파사쥬가 등장하였다. 파사쥬는 보행의 안전과 악천후에 대비된 편리함 속에서 화려하게 장식된 값비싼 것들을 산책하며 구경할 수 있는 곳이자 문화생활도 즐길 수 있는 곳이었다. 상업지구 거리를 따라 온갖 종류의 상점들이 집합적으로 형성되어 새로운 소비의 장을 대중에게 알린 세계였기에 백화점의 기원이 된다.

생산자와 판매자가 분리되고 수공업적 형태의 대량생산이 가능해지면서 등장한 마가쟁 드 누보테가 11830년대와 1840년대 주로 나타났다. 이상점들은 새로운 패션 메가로 다양한 상품을 갖추고 저가, 바겐세일, 출입자유, 교환 및 반품의 자유와 같은 판매정책을 시도하였다. 호화스럽게 꾸며진 넓은 공간에서 상품 종류별로 구역을 나누어 판매했으며 신상품을 교체하여 선보이는 윈도우 디스플레이로 소비자의 시선을 사로잡았기에 백화점의 초기 모델이라고 볼 수 있다.

백화점의 출현에서 보여진 근대화된 상점의 변화는 다음과 같다. 마가쟁 드 누보테가 확대되고 전문화 되면서 등장한 그랜드 마가쟁은 첨단 설비를 갖춘 근대적 공간으로 규모와 연출의 스케일이 강화되었다. 또한 무도회 및 음악교실, 회화교실 등의 교육 프로그램과 도서실, 휴게실, 미술관이 설치되어 파리 사교 살롱의 이미지를 갖추어 소비의 궁전으로 비유되었다.

백화점 출현의 가장 큰 변화는 테마에 따른 상품전시, 반품이나 환불의 자유, 박리다매와 같은 신뢰를 주는 판매정책을 전적으로 실행한 것이다. 또한 판매 비수기의 특정 아이템 세일과 백색상품 세일, 미끼상품과 같은 구매욕을 불러일으키는 전략, 그리고 카다로그 제작을 통한 광고 판매를 확대한 것이다. 이와 같은 마케팅 기획과 홍보 전략으로 소매업의 혁명을 일으킴으로써 근대화된 백화점이 탄생될 수 있었다.

백화점 출현 과정에서 나타난 패션 및 패션산업의 변화는 다음과 같다. 도시 서민의 시장인 탕플에서는 중고의류를 거래하면서 시장이 형성되었지만 수공업의 대량생산 방식으로 노동자를 위한 작업복 등을 제작하여 판매하기 시작했고 점차 일상복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이는 저가의 기성복이었지만 점차 하층 부르주아의 요구와 소매상의 발전에 맞춘 의복을 제작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백화점 탄생 이후 자체개발로도 이어졌다. 기성복의 초기단계에는 케이프, 숄, 망토와 같은 사이즈 제한을 덜 받는 외의류와 액세서리 위주였으나 차츰 속옷, 정장, 드레스 등으로 확대되었다. 특히 백화점이 출현하면서 직물 위주의 산업은 다양한 의류 및 액세서리와 같은 패션 산업으로 치중하게 되었다.

백화점 출현 이후 보여진 패션은 상품 카탈로그를 통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당대의 기성복 콩펙시옹(confection)은 카탈로그에 일러스트레이션으로 견본이 제시되었고 우편발송을 통해 디자인을 홍보하였다. 또한 고객의 체촌이 필요한 반 기성복은 맞춤의상에 비해 저렴한 가격이었다. 패션 아이템은 슈미즈 질레, 코르셋과 같은 속옷류가 소녀와 성인용으로 구분되어 다양한 디자인으로 제작, 공급되었다. 앞치마, 턱받이, 레이스와 같은 의류 소품은 물론 손수건, 양말, 장갑, 모자, 머리장식과 같은 액세서리는 유행에 따라 다양했고 특별 세일 아이템으로도 판매되었다. 백화점의 카탈로그는 판촉 및 구매를 자극하는 라이프 스타일 소개는 물론 신상품을 소개하며 유행을 이끌었을 뿐만 아니라 해외고객에게까지 시장이 확대됨으로써 파리 패션을 전파하였다.

이와 같은 연구결과를 토대로 19세기 파리 백화점이 출현하면서 패션산업에 기여한 바는 다음과 같다. 첫째, 패션 제품의 생산 및 디자인 측면에서 살펴보면 의복의 재료 공급자와 제작자가 구분되었던 구 시스템에서 벗어나 방직기나 직조기의 발명 및 재봉틀과 자수용 재봉틀의 개량으로 기성복 생산이 가능한 환경이 되었고, 작업복 및 앞치마와 같은 노동복의 대량생산이 합리적인 생산과정을 거치면서 몸에 꼭 맞을 필요가 없는 기성복을 제작하게 되었다. 당시의 기성복은 직업적인 제복단계에 머물러 있었지만 이를 백화점에서 점차 고품질의 신규 의상의 취향을 발전시킨 여성 기성복, 콩펙시옹이 가능해지는데 기여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후 사치품 등을 상품목록에 포함시킴으로써 패션의 고급화를 지향하는데 기여하였다.

둘째, 패션 제품의 판매 및 홍보 측면에서 살펴보면 판매방식의 근대화로 신용 판매 정책이 실행되고 신뢰를 주는 백화점의 등장은 소비자가 다양한 상품 속에서 선택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하였고 이를 위해 신상품은 물론 계절에 따른 세일 상품도 제공하였다. 또한 대량생산을 위한 워스의 디자인 모델 판매 시스템 수용과 백화점의 새로운 판매 전략 및 유통체제 대두는 대중소비의 패션이 가능하도록 기여하였고 신제품을 선보이면서 패션의 유행도 만들어 냈다. 쇼윈도, 카탈로그, 포스터 등의 시각자료로 볼거리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카탈로그를 통해 유통, 배달, 제작 시스템의 혁신을 가져왔고 상류층의 라이프 스타일을 보급하여 중산층으로 전파되는데 기여하였다.

셋째, 패션 소비문화의 측면에서 살펴보면 전통적으로 프랑스의 패션은 무엇보다도 궁정의 특권이었지만 19세기 소수의 부유한 사람들을 위한 전유물임을 거부하고 대중화되는데 백화점이 주도권을 행사하도록 길을 열어주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파리 상권의 발달과 상권의 근대화 과정에서 거리의 소비자들을 소비궁전으로 이끌어 백화점 출현이 가능하였다. 쿠튀르의 기원과 기성복의 시작을 필두로 19세기 파리의 시대적 환경과 소매업 혁명으로 백화점이 소비자 시장을 형성해가며 패션산업이 발전하는데 기여하였다.

이와 같은 연구결과에서 나타났듯이 근대화된 상점으로서 백화점의 기원이었던 파사쥬, 새로운 패션상점으로 판매 및 진열 방식으로 백화점의 초기 모델이었던 마가쟁 드 누보테, 그리고 양품점에서 출발하여 파리 최초의 백화점으로 기성복 패션 판매를 정착시킨 봉 마르셰는 19세기 파리 백화점의 출현과 변천 및 발전과정을 담고 있어 패션산업의 근대화 발자취이다. 매우 파리지엔적인 의상을 취급하는 봉 마르셰, 토탈 코디로 제작해서 세트로 판매하는 라 파예트, 보수적이고 고급화를 지향하는 루브르, 그리고 직접 주문 제작한 직물을 판매하는 프렝땅 백화점의 예에서 보여주었듯이 백화점 별로 특화된 상품이나 차별화 전략이 내제되었기에 20세기의 패션산업의 변화에서도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파리 백화점은 국제적으로 지점을 늘려 나가면서 파리의 유행 상품을 소개하여 파리가 세계 패션의 수도가 되는데 기여하였다.

본 연구는 백화점의 탄생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만 고급 여성 기성복이 완성된 20세기의 백화점은 그 역할과 패션에 미친 영향력이 훨씬 커졌기에 다각도의 후속 연구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Acknowledgments

이 논문은 2016학년도 서울여자대학교 자연과학 연구소 교내 학술비의 지원을 받았음

References

  • Antoine Watteau Gersaint shop, (1721), Retrieved October 1, 2016, from http://www.wikipedia.org.
  • Aux Galeries Lafayette, (1908), Toilette d’hiver, catalogue.
  • Baschet, E., (1995), La Grands Dossiers de L’Illustration La Mode〔The grand document of fashion illustration〕, Paris, L'Livre de Paris.
  • Balzac, H. de, (1974), History of the Thirteen(HT), Harmondsworth.
  • Bon Marché, (n.d.), Historique des Magasins du Bon Marché〔History of Bon Marché〕, Strasbourg, Ivres de livres.
  • Bon Marché, (1869), summer catalogue.
  • Bon Marché, (1872), catalogue.
  • Bon Marché, (1873), catalogue.
  • Bon Marché, (1875-76), winter catalogue.
  • Bon Marché, (1898, January), catalogue.
  • Bon Marché, (1912, October), catalogue.
  • Blum, D., (1986), Illusion and Reality Fashion in France 1700-1900, Houston, The Museum of Fine Arts.
  • Charles Marville, (2016), Retrieved October 1, 2016, from https://en.wikipedia.org/wiki/Charles_Marville.
  • Cho, K., (2011), Department-store and things・world・ people, Seoul, Moonhakdongne.
  • Choi, H., (2007), The history of the department store in France in the middle of the nineteenth centurythe case of Bon Marché, Revue core'enne d'histoire francaise, 16, p43-66.
  • Drucker, P., (1992), The Age of Discontinuity, Los Angeles, Transaction. [https://doi.org/10.1016/c2013-0-04383-6]
  • Dusautoy, A., (1867), Rapport du Jury internationale l’Exposition de 1867, 35ème class, Paris, Dentu.
  • Gille, B., (1955), Recherches sur l'origine des grands magasins parisiens, notes d' orientation, Fédération des sociétés historiques et archélogiques de Paris et de l'lle-de-France, MémoireⅤⅡ, p308-321.
  • Grand magasins du Louvre, (1867), catalogue.
  • Groom, G., (2012), Impression, Fashion, & Modernity, Chicago, The Art Institute of Chicago.
  • Grumvach, D., (1993), Histoires de la mode.〔History of fashion〕, Jong Gil Woo Translated, (1994), Seoul, Chang Publishing.
  • Harvy, D., (2003), Paris, Capital of Modernity, Byung Wha Kim Translated, (2005), Seoul, Thinking of Tree. [https://doi.org/10.4324/9780203508619]
  • Her, J., (1987), Paris Mode 200Years, Seoul, YooLim.
  • Hyakkaten, T., (2003), The Appearance of Department store, Tae Moon Lee Translated, (1993), Seoul, Sanseidob Co.
  • Kashima, S., (1991), The Appearance of Departmentstore, Seok Bong Jang Translated, (2006), Seoul, PuriwaIpari.
  • Kim, I., (2006), Cultural history of department: Create modern and time-space of desire, Pazoo, Salim.
  • Laver, J., (1996), Costume & Fashion, London, Thames and Hudson.
  • Lee, J., (2011), Pleasant private life of the bourgeoisie : Research era modern invention, Seoul, Gian.
  • Le Moniteur de la Mode. (1846)
  • Les Arts Decoratifs, (2014), Commisariat de l“Exposition des Arts Décoratifs: Une journée séduisante, Paris au XVIIIe siècle, Seoul, CreationlabAlice.
  • Lipovetsky, G., (1999), L’empire De L’emphemere.〔The empire of fashion〕, Deuk Jai Lee Translated, (1987), Seoul, Moonye Publishing.
  • Loyer, F., (1988), Paris nineteenth century: architecture and urbanism, New York, Abbeville Pr. [https://doi.org/10.5860/choice.26-4886]
  • Mancoff, D. N., (2012), Fashion in Impressionist Paris, New York, Merrell Publisher.
  • Miller, M., (1981), The Bon Marché. Bourgeois Culture and the Department store 1869-1920,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https://doi.org/10.1515/9781400856114]
  • Moncan, P., (2011), Le Nouveau guide des passages de Paris〔New guide of passage of Paris〕, Paris, Les Éditions du mécène.
  • Papayanis, N., (2004), Planning Paris before Haussmann, Baltimore & London, H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https://doi.org/10.5860/choice.43-0562]
  • Parmal, A., & Grumbach, D., (2006), Fashion show Paris style, Boston, Gingko.
  • Pasdermadjian, H., & Hall, Margaret, (1955), The Economic Journal, 65(256), p329.
  • Perrot, P., (1981), Fashioning the bourgeoisie: A history of clothing in the nineteenth century, Jai Han Lee Translated, (2007), Seoul, Hyunsil Moonwha. [https://doi.org/10.2307/206489]
  • Plazy, G., (2003), Paris: history, architecture, art, lifestyle, in detail, Paris, Flammarion.
  • Ribeiro, A., (1988), Fashion in the French Revolution, London, B.T. Batsford Ltd. [https://doi.org/10.5860/choice.26-5819]
  • SEFAG et L’illustration, (1987), Les Grands Dossiers de L’Illustration: La Mode, Paris, Le Livre de Paris.
  • Sassoon, D., (2006), The Culture of the Europeans Ⅱ 1830∼1860, Eun Sook Oho, et al., Translated , (2012), Seoul, Puriwa Ipari.
  • Scrapbook of illustrations relating to the Exposition Universelle Paris. (1867)
  • Simon, M., & Westwood, V., (1995), Fashion in Art: The Second Empire and Impressionism, London, Philip Wilson Publishers.
  • Steele, V., (1991), Women of fashion: twentieth-century designers, New York, Rizzoli. [https://doi.org/10.2307/1358496]
  • Tétart-Vittu, F., & Silveira, P., (1992), Au Paradis des Dames〔The paradise of women〕, Paris, Musee de la Mode and du Costume.
  • Tyagi, A., (2012), History of fashion design, New Delhi, Sonaali Publications.
  • Williams, R., (1982), Dream Worlds: Dream worlds, mass consumption in late nineteenth-century France, Los Angeles,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Figure 1]

[Figure 1]
French railways, 1850, 1860, 1870, 1890 Paris Capital of Mmodernity, p.163

[Figure 2]

[Figure 2]
Rue de Constantine, Paris, ca. 1865 http://www.wikipedia.org)

[Figure 3]

[Figure 3]
View of the Quai d’Orsay, 19th c Paris History, p.264

[Figure 4]

[Figure 4]
bourgeois & proletarian, 1848 Paris Modernity, p.92

[Figure 5]

[Figure 5]
The road i n the 15th c. Bourgeois de Paris, pp.160-161

[Figure 6]

[Figure 6]
Palais de Justice, 17th c. Fashion Show, p.15

[Figure 7]

[Figure 7]
Antoine Watteau Gersaint shop, 1721 (http://www.wikipedia.org)

[Figure 8]

[Figure 8]
Palais Royal, 1780’s Fashion in the French Revolution, p. 21

[Figure 9]

[Figure 9]
Les Halles de Paris, around 1826 (before Baltard). Paris: history, architecture, art, lifestyle, in detail. p. 38

[Figure 10]

[Figure 10]
Louis-Jules Arnout (1814-68), Les Halles Centrales in 1861, Paris: history, architecture, art, lifestyle, in detail. p. 39

[Figure 11]

[Figure 11]
Tailleur for women, 18th c. Une Journée Paris au Séduisante XⅧe siècle, p.91

[Figure 12]

[Figure 12]
Les Galeries de Bois, ca. 1786 Passage de Paris, pp.4-5

[Figure 13]

[Figure 13]
Reading room of Galerie de Bois, 19th c. Passage de Paris, p.28

[Figure 14]

[Figure 14]
Gallerie Viviene 2015 photo by researcher

[Figure 15]

[Figure 15]
Les magasins du Bon Marché, 1863 Les modes de Paris depuis louis ⅩⅥ pp.61-62

[Figure 16]

[Figure 16]
Bon Marché Catalogue, 1872 Bibliothèque François-Mitterrand

[Figure 17]

[Figure 17]
Bon Marché Catalogue, 1875-76 winter Bibliothèque François-Mitterrand

[Figure 18]

[Figure 18]
Bon Marché Catalogue, October 1912 Bibliothèque François-Mitterrand

[Figure 19]

[Figure 19]
Ateliers of lace fabric, 1867 Scrapbook of illustrations

[Figure 20]

[Figure 20]
Bon Marché Catalogue, 1875-76 winter Bibliothèque François-Mitterrand

[Figure 21]

[Figure 21]
Bon Marché Catalogue, January 1898 Bibliothèque François-Mitterrand

[Figure 22]

[Figure 22]
Cutting machine & atelier History of Bon Marché, p.3

[Figure 23]

[Figure 23]
Bon Marché Catalogue, 1898 Bibliothèque rançois-Mitterrand

[Figure 24]

[Figure 24]
The Market of Temple, 1901 La Grands Dossiers de L’Illustration La Mode, pp.66-67

[Figure 25]

[Figure 25]
Le Moniteur de la Mode, 1846 Fashion Show Paris Style. p.51

[Figure 26]

[Figure 26]
La Mode, 1832 Fashion Show Paris Style. p.49

[Figure 27]

[Figure 27]
Spring fashion of Grandes Magasins du Louvre La Grands Dossiers de L’Illustration La Mode, pp.36-37

[Figure 28]

[Figure 28]
Bathing suits Bon Marché designs,1880 The Bon Marché. pp.148-149

[Figure 29]

[Figure 29]
Advertisement of Bon Marché, 1888 Le Monde Illustré p. 355

[Figure 30]

[Figure 30]
Bon Marché Catalogue, 1869 summer Bibliothèque François–Mitterrand

[Figure 31]

[Figure 31]
Bon Marché Catalogue, 1873 Bibliothèque François-Mitterrand

[Figure 32]

[Figure 32]
Pantalon Bon Marché Catalogue, January 1898

[Figure 33]

[Figure 33]
Chemises de nuit Bon Marché Catalogue, January 1898

[Figure 34]

[Figure 34]
Tablier Bon Marché Catalogue, January 1898

[Figure 35]

[Figure 35]
Gilets Bon Marché Catalogue, January 1898

[Figure 36]

[Figure 36]
Comptoir des layettes Bon Marché Catalogue, January 1898

[Figure 37]

[Figure 37]
Bavoirs Bon Marché Catalogue, January 1898

[Figure 38]

[Figure 38]
Comptoir des Corsets Bon Marché Catalogue, January 1898

[Figure 39]

[Figure 39]
Comptoir des Mouchoirs Bon Marché Catalogue, January 1898

[Figure 40]

[Figure 40]
Bonneterie pour dames Bon Marché Catalogue, January 18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