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Association of Human Ecology
[ Article ]
KJHE - Vol. 23, No. 5, pp.905-917
ISSN: 1226-0851 (Print) 2234-3768 (Online)
Print publication date Oct 2014
Received 13 Aug 2014 Revised 14 Sep 2014 Accepted 22 Sep 2014
DOI: https://doi.org/10.5934/kjhe.2014.23.5.905

Study on Origin of Belt and Trinkets of the Joseon Dynasty

LeeYoung-jae*
Dept. Jewerly Fashion Design, Hanyang University
조선 허리띠와 패물(佩物)의 원류에 대한 연구

Correspondence to: * Lee, Young-jae Fax: 031-400-5681 E-Mail: YJL@hanyang.ac.kr

Copyright © 2014, Korean Association of Human Ecology. All rights reserved.

This study clarifies that Scytian waistband had flowed into the Jeoseon Dynasty, and it was settled down to saezodae(which is male belt) and norigae(which is female accessory) and pocket in the Joseon Dynasty. Historical records and relic materials are examined and analyzed by quality assessment. 5 experts performs sensory evaluation for 17 pictures of Scytian waistband, and 42 of norigae, 24 of pocket, 6 of small knife, 11 of belt in the Joseon Dynasty, and finally similarity in form and purpose of use between both of them are come out. Research results are summarized as follows: First, Scytian waistband made with leather and metal was carried in the girdle. Men in the Joseon Dynasty carried various forms of belts as position and jobs such as saezodae, kwangdahae, dongdahae, doa. Trinkets of hopae, jangdo, pocket, etc. are put on belt or separately attached. Belt was not put on the women dress, but more various trinkets were used than those on men dress. Norigae, pocket, and jangdo were used practically and decoratively. Second, The types of Scytian waistband were excavated from the tumulus in the age of three states in Korea, and their form and function are same. Belt of the Joseon Dynasty carried below their chest and up navel, of which the wearing position went upper than before. As women jeogori was shorter, their belt is not necessary and various trinkets were put in their skirt. Finally, this study conclude that Korean traditional belt and trinkets come down from Scythian waistband.

Keywords:

scythia, Waistband, belt trinkets, trinkets, belt, 스키타이, 요대, 요패, 패물, 허리띠

Ⅰ. 서 론

1. 연구배경 및 목적

우리 민족은 역사 이래 고유문화의 면면을 이어와 독특한 조형성을 갖는 복식문화를 영위해 왔다. 그 완성된 형태는 조선 후기에 이르러 절정을 이루다가 개화 이후 서양 의복이 들어와 현재는 서양의복을 주 생활복으로 착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최근 들어 한류의 붐과 더불어 대한민국의 국제적 위상은 높아졌지만 외국인들 시각에서는 중국과 같은 문화와 역사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오해받기 십상이다. 중국은 고대 4대 문명 중 황하를 중심으로 발달된 문명을 이룩하여 주변국들을 조공국으로 전락시켰다. 조선도 왕실의 의복과 관리들의 공복을 중국으로부터 하사받아 착용했으나 속옷과 백성의 복식은 우리 민족 고유의 스타일 그대로 계승되었으며 장신구에서도 그런 요소가 남아있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스키타이 유목민의 액세서리이자 생활용품인 요대가 면면히 이어와 조선시대 남성용 허리띠인 세조대 등과 여성용 장신구인 노리개와 주머니 등의 패물로 정착되었음을 밝히고자 한다. 이를 통해 한국 복식의 원류를 고찰하고 중국 것과는 다른 한국문화의 우수성을 알려 대외 수출경쟁력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를 마련하는 것이 본 연구의 목적이다.

2. 연구범위, 방법 및 연구문제

연구범위는 스키타이 요대와 요패, 삼국시대 요대와 요패, 조선시대 허리띠와 패물이다. 연구방법은 역사적 기록의 문헌자료와 유물자료 등을 수집하여 시대에 따른 종적분석을 실시한 질적 분석을 하였다. 총 100장의 사진 자료 중 스키타이 요대 17장과 조선시대 노리개 42장, 주머니 24장, 장도 6장, 허리띠 11장을 전문가 집단 5인의 관능평가를 통해 형태의 유사성, 사용 용도의 유사성을 밝혔다.

본 논문의 연구문제는 다음과 같다. 첫째, 스키타이의 요대에서 조선시대 허리띠와 패물의 역사 기록 고찰을 통해 그 종류와 용도를 알아본다. 둘째, 유물을 실례로 들어 각각의 형태와 기능 특성을 분석하여 그 유사성을 검증한다. 셋째로 이를 바탕으로 두 시대의 연관성을 입증하기 위해 고대 스키타이부터 한국의 삼국시대를 거쳐 조선시대까지의 요대에서 허리띠, 패물까지의 변천과정을 문헌 고찰을 통해 확인한다.

3. 선행연구 분석

선행연구에서 Kim(1982)는 고대 한국복식의 원류가 스키타이계 복식문화에서 왔음을 밝히고 있고, Kum(2004)은 조선 복식의 장식적 요소로 노리개와 주머니를 고찰하며 실용성과 심미성 측면에서 다루었다. Jeon(1999)은 조선 노리개를 용도별로 묶어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Jang(2008)도 조선 남성용 허리띠와 여성용 노리개를 우리 전통 장신구로서 심도 있게 다루며, Lee et al.(2003)도 신라시대나 고려시대에 조선 허리띠와 패물과 유사한 유물이 있었던 역사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Huh(2002)는 수(繡) 주머니에 대해 소개하며 서양의 포켓이 전혀 다른 형태로 나타남을 정리하였다. 선행연구와 본 연구와의 차별성은 고대 흉노족, 스키타이족 등 기마민족의 요대가 조선시대 세조대 등의 허리띠와 노리개와 주머니 등의 패물로 변화 발전된 것임을 역사적 기록에 따라 종적 분석을 하였다는 것이다.


Ⅱ. 이론적 고찰

1. 스키타이 생활 문화와 요대

스키타이(Scythian)는 기원전 6세기경에서 3세기경까지 남부 유라시아의 초원인 스텝지대에서 활약한 최초의 기마 유목 민족과 문화 양식을 통칭한다. 이들은 페르시아계 유럽인종에 속하며 장신에 강건한 체구를 가졌고, 광대뼈가 나오고 털이 많았으나 몽골족의 요소들도 함께 있었다. 천막과 같은 유동적인 집에서 살았고, 집은 황소들이 끌었다. 말을 갖고 있는 수량에 따라 빈부를 정했으며, 말고기와 말 젖을 즐겨 먹고 마셨으며, 농사를 짓기도 했다(Daehan Text, 2006).

헤로도토스는「역사」에서 그들의 문화가 고대 중앙아시아를 넘어 시베리아, 알타이, 극동 아시아까지 영향을 미쳤고 흑해 북안에 거주하던 스키타인 인들이 상의 위에 서로 다른 모양의 대구가 달린 가죽 벨트를 매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Kim, 2005). 기원전 8세기 전국시대의 중국문화에 영향을 미쳤으며, 한국과 일본에도 파급되었다. 중국은 스키타이식 동물 예술을 수용했는데 특히, 금 또는 청동으로 만든 직사각형의 벨트와 그들 고유의 형식으로 만든 비취와 동석이 주된 유물로 남아 있다(Mallory and Mair, 2000).

스키타이의 장신구 중 요대는 허리에 차고 다닌 무기벨트를 말한다. 그들은 소유자의 칼이나 단검, 베틀엑스, 숫돌 등 자주 사용하는 것을 요대에 매달아 차고 다녔는데 이것은 유목민족의 이동이 많은 생활 특성에 기인한 형식이다. 우크라이나의 고고학적 연구 결과에 따르면 남부 러시아와 카자흐스탄 남자, 전사 여성은 긴 상의 튜닉위에 항상 벨트를 하였으며, 화려하게 장식된 벨트를 지녔다(wikipedia, 2013). 즉, 금속이나 동물 뿔로 된 벨트 고리 혹은 생가죽, 금속 및 황금, 동물 뿔로 된 벨트 플레이트와 함께 착용되었다 그러므로, 스키타이 요대는 실용성 뿐 만 아니라 장식성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 우리민족의 생성과 흉노인, 스키타이인

한반도에서 우리민족의 생성은 신석기 시대였던 기원전 2333년 단군신화를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단군이 조선을 세웠다는 단군신화는 일연의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나타난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나라가 세워진 시기를 청동기 시대로 보고 있어 단순히 설화였을 가능성도 배제 할 수 없다. 그 뒤 고조선이 청동기 문화를 바탕으로 세워졌으며 비파형동검 유물이나 북방식 고인돌 유적으로 그 세력범위를 알 수 있다(Daehan Text (2006).

고대 한반도에 살던 민족에 대한 서양학자들의 견해는 훈족이었다 하고 그 외형적인 모습도 우리 조상의 모습과 유사하다. A. D. 370년 유럽 다뉴브강 현재의 헝가리에 진출한 훈족(흉노)에 대한 기록은 로마인이 많이 남겼다. 훈족은 네모진 얼굴에 광대뼈가 툭 튀어 나오고 납작한 코, 옆으로 가늘게 찢어진 눈, 이마에 편두를 한 키가 작달막한 사람들로 중앙아시아 몽골초원에 살던 몽골계 유목민과 유사하다. 이들은 대제국 로마와 싸워 그들로부터 조공을 받아내면서 활동영역을 서유럽까지 넓혀갔다. 결국 서로마는 훈족과 끊임없는 전쟁을 치루며 국력이 약해져 또 다른 게르만족 칩입으로 멸망하게 된다.

독일 ZDF방송에서 제작한 ‘스핑크스 역사의 비밀’에서 독일 연출가 옌스 페터 베렌트와 미국 코넬 대학 교수인 아이케 슈미트 박사가 훈족을 집중적으로 추적하면서 한반도 남단인 목곽적석 신라고분군에서 발굴되는 많은 유물을 검토 한 후 훈족이 아시아 최극동인 한반도에서 출발 했을지도 모른다고 결론 내렸다. 1997년 미국에서 제작된 훈족 다큐멘터리 ‘Atilla The King of Babarian’에서는 첫 번째 화면에 한반도 지도가 나오면서 붉은 화살표(훈족의 이동경로)가 한반도 본토에서 출발했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독일의 훈족추적 다큐에 참여한 베린토와 슈미트 박사는 한민족과 훈족이 직접 관계있다는 고증으로 가야지방에서 출토된 청동솟과 훈족이 서쪽으로 이동하며 거쳐 간 지역에서 발굴된 청동 솟이 동일하다는 것을 들고 있다. 1924년 경주 노동동 금령총에서 발굴된 기마인물상(국보91호)은 전형적인 유목민의 차림이다. 삼각모와 말 잔등에 실려 있는 청동 솟인 동북은 훈족과 같은 것이다.

스키타이 민족이 바지를 착용하였고 말(馬)과 불가분의 관계였음은 여러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 무용총 벽화의 무용수들이 입은 바지는 스키타이 문화의 영향이고 고구려 각저총 씨름도에 등장한 수염 기른 인물은 스키타이 인인 것으로 추정 할 수 있다.

스키타이 인들의 금으로 된 혁대, 장식품, 장신구, 금관은 스키타이 문화가 한반도 남단까지 영향을 미쳐 꽃 피웠고 신라 문화가 이들의 영향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증명해주고 있다. 신라의 금관과 1세기경에 제작된 아프가니스탄 금관은 스키타이 문화의 산물로 지구상에서 금관을 제작한 국가는 두 나라 이외에는 없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Naver Blog, 2013).

신라의 금관의 지름이 매우 작아 신라인들이 이마에 편두를 하여 머리둘레가 작았기 때문으로 보고 있어 앞서 언급한 로마인들의 훈족의 모습과 동일한 것을 알 수 있다. 신라의 적석목곽분양식이 스키토-시베리안 계통의 파지릭 문화의 적석목곽분과 유사하고, 무덤 내 수많은 부장품들도 스키타이 문화 전래 흔적을 나타낸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스키타이 문화와 신라고분과의 공간적, 시간적 거리 때문에, 이것이 스키타이인의 직접적 전래라기보다는 흉노제국 등의 북방유목민족 등을 통한 간접전파로 이루어졌다고 해석 할 수 있다. 한국 학계에서는 이런 흉노문화의 전파를 추론할 만한 역사문헌의 기록이 부재하기에 신라나 가야의 북방유목민 요소를 접촉에 의한 문화전파로 설명하고 있다.

4세기에서 6세기에 걸쳐 축조된 신라고분에서 출토된 금관, 금동검, 마구, 유리공예품, 생활용품 등 대량의 유물들은, 가까운 고구려, 백제에서 발견되지 않거나, 중국 북부에서도 잘 보이지 않는 것들이다. 이렇게, 이전과 확연히 구분되는 대량의 유물과 급격한 변화는 한 두 차례 문화전파나 교류로는 설명하기 어렵고, 대량의 인구이동 등 장기간의 지속적인 교류가 있어야 하고 문헌의 뒷받침이 없다면 그 타당성을 검증하기 어렵다. 4세기 무렵부터 시작된 신라의 광범위한 스키토-시베리안 문화 현상에 대한 뚜렷한 설명이 되기 어렵다(Naver, 2014).

3.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요대

우리 민족 고유의 옷에는 서양의 주머니처럼 작은 잡동사니 물건을 넣어 보관하는 것이 없었는데 그 대신 간단한 일상용품을 주머니에 넣거나 허리춤에 찰 수 있는 수식품이 발달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스키타이 요대에서 이어온 요패 형태로 여러 수식품이 있는데 그 중 노리개와 주머니는 주로 여성들이 착용한 수식품이자 패물에 속한다. 패물(佩物)이란 사람의 몸치장으로 차는 귀금속 따위로 만든 장식물을 말하며 가락지, 팔찌, 귀고리, 목걸이 따위가 있다(Naver dictionary, 2014). 이런 패물은 농경민족보다는 이동생활을 하는 기마민족들 사이에서 발달하는 것이 특징이므로 우리민족 고유복식이 북방기마민족의 특징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패물이 역사 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면면히 그 형태와 기능의 속성을 잃지 않고 이어내려 오는데 그 대표적인 사례가 신라 고분에서 출토된 요패이다. 요패는 부싯돌이나 숫돌, 칼, 수건 등을 허리에 주렁주렁 차던 것이다. 우리 민족의 허리에 요패를 차던 관습은 한반도에 정착하여 농경생활을 하면서 사라졌지만, 고려시대의 문헌인 「선화봉사고려도경」에 허리에 금방울, 금 향낭을 많이 찬 여인일수록 귀히 여겼다는 구절이 있는 것을 보면 여전히 패물을 즐겨 찬 것을 알 수 있다(Lee et al., 2004). 즉, 「고려도경」에 12세기 무렵의 고려 귀족여인이 비단으로 만든 향주머니를 차고 다녔다는 기록과「삼국유사」에 어려서 비단주머니를 차고 놀았다는 신라의 표훈이야기가 나온다(Huh,2002).

조선시대 남성용 허리띠인 세조대, 동다회 등의 허리띠는 스키타이 요대 중 허리에 차던 벨트부분이 따로 떨어져 나와 정착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남녀공용의 장도도 남성복에서는 허리띠에 달기도 하고 여성은 치마허리에 달아 스키타이 요패 중 가장 긴요한 생활필수품인 작은 칼이 그대로 전승된 것으로 볼 수 있다.


Ⅲ. 유물의 고찰

스키타이의 유물과 삼국시대, 조선시대의 유물을 사례로 들어 분석하고자 한다.

1. 스키타이 요대와 황금 장식품

[Figure 1]의 가죽 허리띠는 양각된 금속벨트 고리로 연결된 가죽 끈이 밑으로 늘어져 있다. 이러한 전사벨트는 가죽, 금으로 만들었으며, 금속이나 동물 뿔로 된 벨트 고리 혹은 생가죽, 금속 및 황금, 동물 뿔로 된 벨트플레이트와 함께 착용되었다. 왼쪽에는 주머니로 보이는 것이 끈으로 매달려 있는데 형태가 흡사 조선시대의 복주머니와 유사하고 그 사용 특성 또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판단된다.

[Figure 1]

Scythia Gold Waistband & Waistband instrument, From. Seoul Arts Center.(2011). p.31.

[Figure 2]의 4세기 말 황금 칼집은 그리스 기술에 영향 받아 호사스럽고 섬세한 금세공 기술을 보여주고 있다. 황금 칼집과 칼자루 장식을 한 황금 칼에 사자와 그리핀에 물린 두 표범과 사슴이 양각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러한 황금장식품은 코카서스 지방과 흑해 북쪽 지방의 초원지대, 서아시아 주변의 봉분에 왕족이나 귀족들의 시신과 함께 찾아볼 수 있다. 또, 그리스인으로부터 거울을 받아들여 사용하였으며 수많은 황금제 용기와 장신구는 그리스의 공장(工匠:職人)이 스키타이에 보내기 위해 제작 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Figure 2]

Gold Sheath & Sword, From. Scythian Golden Civilization Exhibition.(2011). p.21.

[Figure 3]의 스키타이 전사상을 통해 요대의 착용모습을 확인 할 수 있다. 허리까지 오는 긴 튜닉에 가죽 끈이 매달려 있는 요대를 걸친 모습으로 당시 전사들의 형상을 유추해 볼 수 있다.

[Figure 3]

Scythia Soldier Statue, From. Scythian Golden Civilization Exhibition.(2011). p.25.

[Figure 4]는 황금 고리투스이다. 고리투스는 화살통으로 단검과 함께 요대에 착용되었고 꽃문양, 동물이 싸우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고대에 전래된 활과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가 새겨져 있고 태양, 수사슴과 나무가 삶과 생산의 풍요를 상징하여 스키타이 인과 함께 장식에 자주 사용되었다(Scythian Golden Civilization Exhibition, 2011).

[Figure 4]

Gold Loop Tooth, From. Seoul Arts Center.(2011). p. 33.

[Figure 5]의 스키타이 족장 무덤에서 발굴된 황금돼지 장식물은 기원전 6〜5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금과 에나멜의 재질로 이며 나무로 된 칼집의 앞면에 붙어 있다. 스키타이 인들은 황금을 양각하여 다른 재질에 부착하기도 했는데, 시기상으로 그리스의 세공기술이 영향을 끼쳤던 초기의 것으로 보인다. 스키타이 유목민의 특징을 나타내는 입체적 또는 투조풍(透彫風)의 동물 의장(意匠)이 특히 주목된다.

[Figure 5]

Wild Boar Pattern Sheath, From. Seoul Arts Center.(2011). p.35.

2. 삼국시대 허리띠

삼국시대의 허리띠는 경주시 청마총에서 출토된 국보 160호로 남아있는 신라 금 허리띠가 있다. 삼국시대에는 저고리에 해당하는 상의(上衣)가 길었기 때문에 허리띠를 둘렀는데, 이 허리띠에 갖가지 장식품을 달았던 것이 요패이다(Jeon, 1999).

[Figure 6]은 고 신라시대의 금제 과대와 요패로 서봉총에서 출토되었다. 금과판을 투각하여 장식한 44개의 과판 밑으로 온갖 장신구가 둥근 영락과 함께 주렁주렁 매달려 있고(Lee & Shin, 2005), 스키타이 가죽벨트와 유사하다. 허리띠의 온갖 장식은 유목생활을 하면서 사용하기 위한 각종 연장을 매달은 것에서 유래했다(Korea Creative Content Agency, 2004).이러한 특징은 황남대총을 비롯한 5세기 신라 허리띠에서 찾아볼 수 있어 삼국시대 허리띠는 스카타이 요대가 변형 발전된 것으로 유추 할 수 있다. [Figure 7]은 경북 영천시 금호읍 어은리 출토 마형(馬形), 호형 대구(虎形帶鉤)로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초기 철기시대에서부터 삼국시대까지 널리 사용된 허리 띠고리로 말과 호랑이가 선명하게 조각되어 있다.

[Figure 6]

Ancient Shilla Gold Waist band and Belt trinkets, From. Kum.(2004). p.121.

[Figure 7]

Belt Loop From. Jang.(2002). p.9.

장식물이 달린 허리띠는 고구려에서도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고구려 벽화에서 찾아 볼 수 있다. [Figure 8]의 고구려 안악 3호 벽화와 [Figure 9]의 무용총 벽화 통해 벽화 속 인물들이 상의가 긴 저고리 위에 장식물이 달린 허리띠를 하고 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Figure 8]

Goguryeo Anak 3 Mural Tomb, From. Hong et al.(2011).p.57.

[Figure 9]

Goguryeo Mooyong Mural Tomb. From. Hong et al.(2011). p.39.

[Figure 10]의 아프라시압 궁전 벽화를 보면 7세기 무렵 사절단으로 온 고구려인의 복식을 볼 수 있다. 아프라시압 궁전은 우즈베키스탄의 중심도시 사마르칸트에서 소그디아나가 번성하던 시절에 세워진 것으로 1965년에 발굴되었다. 오른쪽 아래 모자에 깃털을 꽂은 두 사람이 고구려 사신으로 허리에 요패를 차고 있는 모습이 보이며 끝에는 대구(帶鉤) 혹은 교구(鉸具)로 맺고 있다. 호복고「胡服考」를 보면 고혁대상용구(古革帶常用鉤)라 하여 혁대에는 구(鉤)를 사용하고 있었음을 증명하고 있다(Kim, 1982). 신라 금관총 출토의 과대와 요패이다. 과대 길이가 1미터 10센티에 이르고 과판이 39매, 황금요패가 17가닥 매달려있다. 과판에 원형 영락과 늘어뜨린 심엽형 수식이 호화롭다(Hwang,1996)

[Figure 10]

Afrasiab painting in Samarkand. From. National Museum of Korea.(2004).p.85.

[Figure 11]은 여성들이 부처에 재를 받을 영기를 모시고 법회장소까지 가는 의식에 쓰이던 연수식이다. 보문사 소장의 이 연(輦)수식은 궁중 매듭의 빼어난 솜씨와 우아한 품격을 원형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유물로 평가되고 있다(National Museum of Korea, 2004). 이 요대는 매듭으로 된 허리띠 아래로 옥구슬, 향, 패옥 등을 매듭으로 꾸민 각종 장식을 늘어뜨렸다. 한충향, 패옥, 칠보(七寶), 무병장수 상징의 천도(天桃) 등의 자수품들이 있는데 칠보중 하나인 호리병 모양 여의보주(如意寶珠)에는 불교를 상징하는 만자가 충전으로 자수하였고, 그 밑에는 연화(蓮華)를 단순한 형태로 자수한 미적 요소가 돋보인다. 옥구슬과 패옥에서는 주로 황색이 두드러지는데 이는 당시 황제의 색으로 여겼던 황금, 황색으로 이 연 수식이 더욱 귀한 치장인 것을 알 수 있다.

[Figure 11]

Yeon emblazonment, From. National Museum of Korea.(2004). p.289.

3. 조선 노리개

조선 시대 노리개는 띠돈, 주체, 매듭, 장식술로 구분되며 주로 노리개의 명칭은 주체와 재료, 형태에 따라서 결정되었다. 노리개는 모양이 섬세하고 다채로워 비교적 담백한 색조의 우리 복식에서 뚜렷하여 두드러져 보이며 여성 장신구로서 많이 애용되었다. 그러나 일반 궁녀는 관례 시 하루만 찰 수 있었으며, 상궁은 국혼이나 대례복에 한해 찰 수 있었을 정도로 귀하게 여겨졌다(Jang, 2008). 양반계급에서는 보패류로 만들어 가보로 자손대대 물려주기도 했다.

띠돈은 노리개를 걸 때 사용하는 일종의 걸개 장식인데 노리개가 한 개 달려 있으면 단작이라 하였고 3개 있으면 삼작이라 하여 단작은 평상시에 찼던 반면 삼작은 경사나 예복에서 차고 있었다. 삼작은 홍색과 청색, 황색의 삼색으로 구분된다. 홍색은 산호, 청색은 공작석, 황색은 호박인 밀화를 많이 사용하였다. 백색은 백색 산호나 진주, 진옥을 썼다.

[Figure 12]는 투호를 단 대삼작노리개로 18세기말 제작된 것이다. 투호는 병 안에 화살을 던져 넣는 궁중 놀이기구로 역귀를 쫓는 기능을 지닌 것으로 알려졌다. 은에 파란을 입히고 홍옥과 비취 구슬로 장식했다. 파란은 유리 같은 물질을 녹여서 마른 법랑(琺瑯)기법으로 꾸민 것을 말한다. [Figure 13]는 박쥐 주체를 단 삼작노리개이다. 박쥐는 서양에서는 흡혈하는 공포와 기피의 대상이나 동양에서는 길상 동물이었다. 특히, 다산(多産)과 복신(福神)을 상징하여 여성의 장신구에 많이 사용되었다. 그 이유로는 박쥐를 당시에는 편복문(蝙蝠文)이라 불렀는데, 여기서 박쥐를 뜻하는 복(蝠)자가 복(福)자와 발음이 같았기 때문이기 때문이다. 은사를 꼬아 박쥐를 정교하게 만들어 금도금하고 그 위에 파란을 입혔다(Jeon, 1999).

[Figure 12]

Tuho Big Three knot Norigae, From Jeon.(1999).p.130.

[Figure 13]

Gild Nisa Bat Three knot Norigae, From National Museum of Korea.(2004) p.187.

[Figure 14]는 동자삼작노리개로 20세기 초에 만들어졌다.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 영왕(英王) 이은(李垠)의 비 이방자(李方子)여사가 소장하고 있던 노리개 중 하나이다. 영왕의 초, 삼간택 때 작성된「수식패물발기」에는 진주 동자, 자마노 동자, 공작석 동자 등 동자를 주체로 한 노리개가 기록되어 있어, 이 유물은 그와 관련된 동자 노리개일 것으로 추정된다. 동자는 다남다복의 행복한 삶을 상징한다. 주체는 두 명의 동자가 양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나란히 서 있는 모습으로 밀화, 공작석, 산호로 구성되어 있다. 술이 다채롭고 금사 등이 화려함을 더해주고 있다(National Museum of Korea, 2004).

[Figure 14]

Child Three knot Norigae, From National Museum of Korea.(2004).p.210

노리개 주체로서 향낭(香囊)은 비교적 일찍부터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조선시대에는 향을 환으로 만들어실로 꿰어 줄향으로 꾸미거나 향갑, 향낭에 넣어 장신구로 만들었다(National Museum of Korea, 2004). 향낭은 남성도 패용했는데 「조선왕조실록」기록에서는 향낭을 상방(尙方)에서 제조하여 각 전에서 신하에게 하사하였다는 사례가 있음을 언급하고 있다. 이처럼 남녀 구별 없이 많이 쓰인 소품이었다. 여성은 노리개 등으로 허리에, 남성은 향낭, 향주머니로 소매 안이나 기타 장식품에 넣어 자신뿐만 아니라 주위사람들의 기분도 좋게 했으며 응급 시 구급약으로 치료효과의 역할을 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Figure 15]는 형태가 특이한 비취발향노리개이다. 이는 궁중에서 사용한 것으로 비취모라는 푸른 호반 새 깃털을 줄에 꿰어 향나무 원통을 엮어 상. 중. 하단의 붉은 비단에 수를 놓고 외곽에 징금수로 장식한 것을 엮었다. 붉은 비단 가운데 희(囍)자 주변으로 꽃문양, 천도문양의 자수가 있어 경사 시 사용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하단의 자수 밑으로는 산호구슬과 장식 술을 늘어뜨렸다(Lee et al., 2004).

[Figure 15]

Jade Perfume Norigae, From Lee & Hong & Jang.(2003).p.131

실용적인 노리개로 침통을 단 노리개와 바늘집노리개, 방아다리노리개, 장도노리개, 안경집형 노리개가 있다. [Figure 16]은 원통형의 침통에 한그루의 매화나무를 새기고 파란을 올려 꾸민 노리개이다. 침통에 바늘을 넣은 후 아래쪽의 마개를 여닫을 수 있도록 만들어 평상시에 차고 다녔다. 은색 침통에 매화나무가 자리 잡고 있는데, 침통으로써의 실용적인 면과 미적인 면 모두를 보여주고 있어 기능과 멋의 조화가 돋보인다. [Figure 17]은 바늘집노리개로 홍색 단(緞)에 나비와 연꽃, 모란 등을 수놓아서, 사뜨기로 앞뒷면을 연결한 노리개이다. 사뜨기는 매우 튼튼하면서 장식성이 강한 바느질 기법으로 머리카락을 땋았을 때의 문양과 비슷하다. 위쪽으로는 노란색 끈이 달려있고 아래쪽으로는 붉은색 천이 달려있다.

[Figure 16]

Sliver Blue Enamel Needlecase Norigae, From Lee & Hong & Jang.(2003).p.142

[Figure 17]

Embroidery Needlecase Norigae, From Lee.(2005).p.78

[Figure 18]은 농기구인 방아다리의 형태를 본뜬 방아다리노리개로 귀이개 모양의 다리 양 옆에는 중앙에 壽(수)자 문양이 있는 댓잎 모양의 장식이 있다. 윗부분 연결장식은 화문을 투조한 것으로, 붉은 천을 안에 넣어 장식했다. 방아다리는 농기구를 본 따 만들어 졌지만, 사치스러운 노리개를 칭하기도 한다. 금 ·은 ·옥 등의 값비싼 재료로 만든 것으로 위는 사람이 양쪽 팔을 늘인 것처럼 되어 있고, 양쪽 끝은 가로로 비녀가 있고 그에 의지하여서 두 다리가 달려 있었다. 주로 부자 집 지위 높은 귀부인들이나 어린 아이들의 몸치장에 패용되었다. [Figure 19]는 은장도 위에 화문과 만초문을 새기고 장도의 양단과 중앙에는 붉은 산호구슬을 물려 장식했다. 장도노리개는 실용적인 목적에서 사용되기도 했지만, 조선시대에 와서는 여성의 정절을 상징하는 역할이 강조되었다. [Figure 20]은 안경집을 주체로 하는 18세기에서 19세기 사이의 노리개이다. 이 유물은 안경집 모양의 은에 파란을 입힌 향집이다. 당시 안경은 높은 지위와 부(富)의 상징이었고 고위층사이에서 유행하였다. 이 밖에도 골무를 주체로 한 골무노리개, 목재측면이 강한 노리개가 있었다(Lee et al., 2004).

[Figure 18]

Sliver Bangadari Norigae, From Lee & Hong & Jang.(2003).p.136

[Figure 19]

Sliver Knif Norigae, From Lee & Hong & Jang.(2003).p.132

[Figure 20]

Spectacle case Perfume Norigae, From Jeon.(1999).p.98

4. 조선 주머니

우리 전통한복에는 주머니가 없어 조상들은 수 천년동안 주머니 없는 의복을 착용 해왔다. 꼭 필요한 물건을 여자는 속치마 끈에 주머니를 달거나 남자는 허리춤에 주머니를 패용했고 주머니 안에 들어가지 않는 물건은 보자기에 싸서 들거나 허리춤에 걸쳤다. 주머니는 지방에 따라 조마니, 개줌치, 줌치, 안집, 개와속으로 불렀고 낭(囊)이나 협랑(狹囊)으로 표기한다.

주머니는 잡귀를 물리치고 만복을 가져온다고 믿었다. 조선시대의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를 보면 음력 정월 돼지날(4일)에 해낭(亥囊)을 만들고 쥐날(5일)에 자낭(子囊)을 만들어 왕과 비를 비롯해 신하가 함께 찼는데 주머니 속에 볶은 콩 세 알을 넣어 풍년을 기축했다. 민가에서 토끼날(8일)에 누에고치에서 새로 뽑은 실을 주머니 끝에 매달아 새해에 복 많이 받기를 비는 습속이 있었다. 「세조실록」에 1457년 궁중 뒤뜰에서 활쏘기 대회를 하여 왕이 성적이 우수한 신하에게 주머니를 상으로 내린 기록이 있다. 이렇듯 주머니는 예로부터 기념물이나 선물용으로 즐겨 사용했다. [Figure 21]은 궁중 약주머니로 화려한 자수가 돋보인다. 부적을 넣어두는 작은 부적 주머니는 큰 주머니 속에 넣어 차고 다녔다. 복주머니는 안에 쌀, 깨, 조, 팥 등 곡식을 넣어 정초에 어린아이에게 매어주며 한 해 동안 복이 깃들기를 기원했다.

[Figure 21]

Court Medicine Pocket, From Huh.(2002). p.64

우리 전통 주머니의 기본 형태는 두루주머니와 귀주머니로 나뉜다. 두루주머니는 밑이 둥글고 주머니 입에 잔주름을 잡아 입 양쪽으로 끈을 꿰어 졸라매면 입이 오므라져 그 생김새가 두루게 즉, 둥글게 된다. 금(金), 복(福으), 오(五) 길상문자를수 놓았다[Figure 22]. 귀주머니는 네모지게 꾸며서 입 쪽 위 절반을 두 번 접어 아래 양쪽으로 귀가 나오게 만든 것이다[Figure 23]. 금박으로 길상문자를 시문하고 중앙에 연꽃을 수 놓았으며 잠자리 매듭으로 끈을 장식했다. 신분과 남녀에 따라 주머니의 형태가 달랐다. 왕이 지니는 주머니에는 십장생을 수놓았고 왕비는 많은 진주가 박힌 화사한 주머니를 지녔다. 귀주머니는 남자가 두루주머니는 여자가 애용하였다. 주머니의 입이 아홉 번 접힌 것은 궁중용이고, 세 번 접힌 것은 서민용이었다(Huh, 2002).

[Figure 22]

Duru Pocket, From Huh.(2002). p.63

[Figure 23]

Ear Pocket, From Huh.(2002). p.63

5. 조선 장도

[Figure 24]의 장도는 스키타이시대와 삼국시대 요대의 요패로써 달려 있던 것이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분리되어 패물 형태로 남녀 구별 없이 많이 패용하였던 작은 휴대용 칼이다. 주로 은으로 만들고 장도 집에 칠보나 파란으로 장식을 하였다. 남성은 고름, 허리띠, 포의 술띠에 차고 여성은 치마허리에 걸거나 노리개의 주체로 삼아 겉고름, 안고름에 착용하였다(Koreana Cosmetic Museum, 2006). 부녀자들은 장식용으로서만이 아니라 호신용으로, 정절의 상징으로 중요하게 여겨졌다. 장도는 노리개로 치는 것은 패도라고 하고, 주머니에 넣어 다니는 것은 낭도라고 했다. 장도에는 젓가락이 함께 달린 것이 많았는데, 휴대하면서 젓가락으로 사용하기도 하고, 음식의 독을 분별하기도 하였다(The National Folk Museum of Korea, 1997).

[Figure 24]

Jangdo(Knif), From. The National Folk Museum of Korea(1997). p.139

6. 조선 허리띠

[Figure 25]는 허리끈 조아(絛兒)이다. 길이 374센티미터, 너비 2.5센티미터로 국립박물관소장품이다. 견사로 치밀하게 짠 것으로 양 끝에 술 장식이 매우 정교하며 오른쪽 것은 술 장식부분을 확대한 것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유교적 이념에 따라 여성들의 집밖 출입이 제한되게 된다. 그래서인지 여성들의 외투인 포류에 허리띠를 하지 않아 조선시대 여성복에서 요대의 흔적을 겉옷에서 찾아 보기 힘들다. 이에 비해 남성들의 복식은 신분에 따라 다양한 형태가 있어 그에 맞는 각종 요식품(腰飾品)이 발달된 것을 알 수 있다.

[Figure 25]

Belt, From. Jang(2003). p.129

관복의 각대(角帶)를 제외한 조선시대 남성의 히리에 띠는 띠에는 세조대, 광다회, 동다회, 요대 등이 있다. 「경국대전」에는 1품에서 3품까지 사복에 홍조아(紅絛兒)를 띠도록 하고, 향리와 인로를 제외한 녹사에서 조례까지는 공복에 조아(絛兒)를 띠도록 하였다. 향리도 상복에는 조아를 띤다.

[Figure 26]의 오른쪽 주황색 색동은 요대이고 왼쪽 것은 광다회 앞뒷면이다. 요대는 길이 220센티미터와 160센티미터, 너비 4센티미터로 이화여자대학교 담인복식미술관 소장품이다. 평직으로 짠 양 끝에 꼰실로 전복술 매듭을 여러단 맺었다. 왼쪽의 것은 궁중유물전시관 소장품인 광대회로 표면을 납작하게 짠 평직으로 문양이 들어가 있다. [Figure 27]은 이화여자대학교 담인복식미술관 소장품인 세조대로 다회를 쳐서 만든 가는 원다회로 된 실띠이다. 조선시대 남성복인 답호, 도포, 전복 위에 띠었다. 도포띠, 쾌자띠, 분합띠라고도 한자로 끈 조(絛)이나 경국대전에서는 도아(絛兒)로 표기하고 있다. 당상관은 훈(纁)색 자(紫)색을, 당하관은 청색, 녹색을 사용하였다.

[Figure 26]

Waistband・Kwangdahae From Jang(2003). p.141

[Figure 27]

Saezodae From Jang(2003). p.134

[Figure 28]은 동다회로 일명 납작띠라고도 부른다. 학창의에 검정색 딸기술이 달린 동다회를 띠기도 하였는데 관이나 양반가의 선비들이 예복에 띠었던 실로 짠 납작하고 좁은 띠 이다(Jang, 2003).

[Figure 28]

Dngdahae From Jang(2003). p.136


Ⅳ. 결과 및 토의

1. 자료수집과 분석

이 연구는 역사적 기록을 토대로 한 문헌 연구와 유물을 중심으로 연구하였다. 스키타이 황금전의 전시도록에 나타난 유물 사진과 태평양박물관 소장의 조선시대 노리개의 유물, 사전 자수 박물관의 조선시대 주머니, 박물관 소장의 장도, 허리띠 등 중 총 100장의 사진을 수집하여 분석하였다. 스키타이의 요대, 삼국시대 요대들과 조선시대 허리띠, 패물을 함께 비교 분석하여 고찰하여 스키타이 요대가 변천과정을 거쳐 조선시대 허리띠와 패물에 이른 것이라는 가설을 입증하고자 하였다. 이에, 연구범위는 고대 한반도부터 한국의 삼국시대를 거쳐 조선시대 후기까지의 요대와 허리띠, 패물들이다.

연구방법은 역사적 기록의 문헌자료와 유물자료 등을 수집하여 시대에 따른 종적분석을 실시한 질적 분석을 하였다. 총 100장의 사진 자료 중 스키타이 요대 17장과 조선시대 노리개 42장, 주머니 24장, 장도 6장, 허리띠 11장을 전문가 집단 5인의 관능평가를 통해 형태의 유사성, 사용 용도의 유사성을 밝혔다.


Ⅴ. 연구문제

본 논문의 연구문제는 다음과 같다. 첫째, 스키타이의 요대에서 조선시대 허리띠와 패물의 역사 기록 고찰을 통해 그 종류와 용도를 알아본다. 둘째, 유물을 실례로 들어 각각의 형태와 기능 특성을 분석하여 그 유사성을 검증한다. 셋째로 이를 바탕으로 두 시대의 연관성을 입증하기 위해 고대 스키타이부터 한국의 삼국시대를 거쳐 조선시대까지의 요대에서 허리띠, 패물까지의 변천과정을 문헌 고찰을 통해 확인한다.


Ⅶ. 연구결과

연구문제에 따른 연구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스키타이의 요대는 가죽과 금속재료로 된 것이 대부분으로 기마민족의 생활 속에서 잦은 이동에도 불편함 없이 생활용품과 중요 물품을 허리에 찼던 것이 시작이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 남성복은 포위에 허리띠가 세조대, 광다회, 동다회, 도아 등 다양한 형태로 신분이나 직업에 따라 세분화되어 착용되었다. 패물은 호패와 장도, 주머니 등으로 허리띠에 달려있거나 분리된 형태로 나타나고 있었고, 여성복에서는 허리띠가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았지만 패물은 남성복식보다 다양한 종류와 형태가 있었다. 노리개가 그 중 하나인데 보석을 달아 부를 과시하거나, 발향, 바늘, 침, 안경, 장도 등을 담는 실용적인 목적, 복을 불러온다고 믿는 박쥐를 주체로 한 기복의 용도가 있었다. 주머니는 노리개보다 넓은 면적에 기복의 문자를 수 놓았고 작은 물건을 담을 수 있는 실용적인 용도로 사용 되었다. 남녀 공용의 장도도 호신용과 여성들의 절개를 상징하는 의미를 갖고 있어 실용적인 목적과 상징적인 용도를 함께 갖고 있다.

둘째, 유물을 실례로 들어 각각의 형태와 기능 특성을 분석한 결과 스키타이 요대는 허리부분에 차던 것으로 허리띠인 가로의 요대와 요대에 세로로 달려 있던 요패로 분리하여 설명 할 수 있다. 삼국시대부터는 농경생활이 주생활로 실용적인 목적보다는 장식적인 기능의 유물로 요대가 나타나고 있다. 고려시대에는 요대에 요패로 금방울, 금향낭 등을 즐겨 착용한 기록이 있다. 이러한 요대는 조선시대에 남성복 겉옷 위의 다양한 허리띠로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가슴아래, 배꼽 위에 착장함으로써 위치가 이전시대보다 올라간 것을 알 수 있다. 여성은 저고리 길이가 짧아지면서 허리띠의 필요성이 없어지고 치마위에 어깨걸이 역할을 했던 치마허리가 있어 그곳에 패물을 달았다. 이로써 남녀모두 착장 위치가 상승하고 기능적인 면에서 실용적인 목적도 있으나 유물의 대부분은 장식적인 목적과 상징적인 의미를 담아 패물을 달았던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스키타이 요대와 조선시대 허리띠, 스키타이 요패와 조선시대 패물은 형태와 기능이 많은 부분 유사하나 후대로 내려오면서 실용적인 목적보다 장식적인, 상징적인 목적이 많아졌다.

셋째로 고대 스키타이 유물이었던 요대가 고구려시대의 무덤 벽화나 삼국시대의 고분 출토 유물인 요대에서 이어져 내려온 것을 확인 할 수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기록으로 스키타이 요대의 요패가 금방울, 금 향낭 등, 부분적으로 내려오고 있음을 알 수 있었고 조선시대가 농경사회임에도 조상 대대로 유목 기마민족의 요대가 허리띠와 장신구인 패물의 형태로 남아 지속적으로 이어져 온 것을 확인 할 수 있었다. 이로써 스키타이 요대와 요패가 조선시대 허리띠와 패물로 변천과정을 통해 이어져 온 것을 입증 할 수 있다.


Ⅷ. 결론

본 논문에서 스키타이 요대와 조선시대 허리띠, 패물, 그리고 둘을 연결하는 삼국·고려시대의 요대와 요패의 연관성을 살펴보고, 각각의 유물을 실례로 들어 특성을 분석하여 보았다. 그 결론은 다음과 같다.

스키타이 복식의 장신구이며 허리띠였던 요대와 요패는 한국 삼국시대에는 동일한 형태의 것이 유물로 남아있고 고려시대는 요패의 일종인 주머니를 찼다는 기록을 확인 할 수 있었다. 조선시대 유물들은 형태가 스키타이 것과 동일하여 과대에 요패가 주렁주렁 걸려 하나인 반면 조선시대에는 패물과 허리띠로 분리되었다. 즉, 스키타이 요대는 조선시대 허리띠로 스키타이 요패는 조선시대 패물로 변화 발전되어 내려 온 것이다.

조선시대 남성 복식의 세조대, 광다회 등의 허리띠는 스키타이의 요대가 변형 발전된 것이고 허리에 찼던 호패, 허리띠나 포류의 대에 매달았던 장도와 주머니 등의 패물은 스키타이 요패와 같은 기능과 형태로 나타남을 알 수 있다. 호패는 신분증으로 고대보다 사회가 다분화 발전되어 나타난 패물이며 장도와 주머니는 스키타이 요대의 착장방식 그대로 내려온 것을 알 수 있었다. 여성복에서 허리에 두르던 허리띠가 자취를 감추게 되는데 후기로 내려오면서 저고리 길이가 짧아지고 고름이 크기가 커지고 길이가 길어지면서 허리띠의 필요성이 없어져 여성복에서 이전 시대의 과대 즉, 허리띠가 자취를 감추게 된 것이라 사료된다. 남성복도 여성복과 마찬가지로 저고리 길이가 짧아졌으나 사대부들의 외출 시 외투라 할 수 있는 포류를 착용함으로써 허리띠인 세조대, 광다회 등이 남게 된 것으로 해석 할 수 있다. 여성복도 외투인 포류가 남아 있었으나 남성에 비해 사회활동이 전무하였으므로 과대의 발전 형태인 허리띠의 필요성이 없어 자취를 감춘 것으로 판단된다. 허리부위의 허리띠가 외부에서 보여지지 않고 치마는 어깨에서 걸치는 어깨걸이가 있고 치마말기에서 허리띠 역할을 했던 띠로 묶게 되었다. 주로 이 부분에다 스키타이의 요패에 해당하는 패물을 장착했으며 다양한 노리개, 주머니, 장도 등을 매달았다.

이상에서 고대 스키타이 요대가 착장방식, 착용하는 목적과 기능적인 측면에서 동일하거나 유사하게 조선시대까지 면면히 내려왔음을 알 수 있었다. 고대 스키타이 요대에서 생활 속 소품이나 장신구를 매달았던 것이 조선시대에는 보석 노리개, 침통 노리개, 장도 노리개, 향갑노리개 등 실용적, 장식적 목적으로 하나씩 떨어진 형태로 달리게 된 것이다. 고대에 비해 조선시대에는 장식적, 상징적인 목적이 더 강했고 문화적으로 길상적 의미를 담는 복주머니가 세분화되어 발전하였다. 복주머니나 노리개에는 상서로운 동물, 식물, 글자 등을 포함하여 기축의 의미가 강해졌음을 알 수 있었다. 즉, 이번 연구를 통해서 스키타이 요대가 조선시대 허리띠와 패물의 원류임을 밝힐 수 있었다.

Notes

“이 논문은 2014년 한양대학교 교내연구비 지원으로 연구되었음(HY-2014-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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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1]

[Figure 1]
Scythia Gold Waistband & Waistband instrument, From. Seoul Arts Center.(2011). p.31.

[Figure 2]

[Figure 2]
Gold Sheath & Sword, From. Scythian Golden Civilization Exhibition.(2011). p.21.

[Figure 3]

[Figure 3]
Scythia Soldier Statue, From. Scythian Golden Civilization Exhibition.(2011). p.25.

[Figure 4]

[Figure 4]
Gold Loop Tooth, From. Seoul Arts Center.(2011). p. 33.

[Figure 5]

[Figure 5]
Wild Boar Pattern Sheath, From. Seoul Arts Center.(2011). p.35.

[Figure 6]

[Figure 6]
Ancient Shilla Gold Waist band and Belt trinkets, From. Kum.(2004). p.121.

[Figure 7]

[Figure 7]
Belt Loop From. Jang.(2002). p.9.

[Figure 8]

[Figure 8]
Goguryeo Anak 3 Mural Tomb, From. Hong et al.(2011).p.57.

[Figure 9]

[Figure 9]
Goguryeo Mooyong Mural Tomb. From. Hong et al.(2011). p.39.

[Figure 10]

[Figure 10]
Afrasiab painting in Samarkand. From. National Museum of Korea.(2004).p.85.

[Figure 11]

[Figure 11]
Yeon emblazonment, From. National Museum of Korea.(2004). p.289.

[Figure 12]

[Figure 12]
Tuho Big Three knot Norigae, From Jeon.(1999).p.130.

[Figure 13]

[Figure 13]
Gild Nisa Bat Three knot Norigae, From National Museum of Korea.(2004) p.187.

[Figure 14]

[Figure 14]
Child Three knot Norigae, From National Museum of Korea.(2004).p.210

[Figure 15]

[Figure 15]
Jade Perfume Norigae, From Lee & Hong & Jang.(2003).p.131

[Figure 16]

[Figure 16]
Sliver Blue Enamel Needlecase Norigae, From Lee & Hong & Jang.(2003).p.142

[Figure 17]

[Figure 17]
Embroidery Needlecase Norigae, From Lee.(2005).p.78

[Figure 18]

[Figure 18]
Sliver Bangadari Norigae, From Lee & Hong & Jang.(2003).p.136

[Figure 19]

[Figure 19]
Sliver Knif Norigae, From Lee & Hong & Jang.(2003).p.132

[Figure 20]

[Figure 20]
Spectacle case Perfume Norigae, From Jeon.(1999).p.98

[Figure 21]

[Figure 21]
Court Medicine Pocket, From Huh.(2002). p.64

[Figure 22]

[Figure 22]
Duru Pocket, From Huh.(2002). p.63

[Figure 23]

[Figure 23]
Ear Pocket, From Huh.(2002). p.63

[Figure 24]

[Figure 24]
Jangdo(Knif), From. The National Folk Museum of Korea(1997). p.139

[Figure 25]

[Figure 25]
Belt, From. Jang(2003). p.129

[Figure 26]

[Figure 26]
Waistband・Kwangdahae From Jang(2003). p.141

[Figure 27]

[Figure 27]
Saezodae From Jang(2003). p.134

[Figure 28]

[Figure 28]
Dngdahae From Jang(2003). p.136